경남 통영시에는 세 개의 ‘피랑’이 있다. ‘동피랑’과 ‘서피랑’ 그리고 ‘디피랑’이다. 피랑은 비탈을 가리키는 통영 사투리다. 동쪽에 있는 피랑을 뜻하는 ‘동피랑’은 2007년 벽화마을이 조성되면서 통영을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됐다. ‘서피랑’은 동피랑과 마주하고 있는 비탈마을로 이곳 역시 알록달록한 벽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동피랑과 서피랑은 2년마다 벽화를 새로 그려 넣는다. 그때마다 사라지는 벽화들은 ‘디피랑’에서 매일 밤 미디어아트로 되살아난다.
디피랑(디지털+피랑)은 2020년 10월 문을 연 디지털 테마파크다. 동피랑과 가까운 남망산 조각공원 산책로를 따라 1.5㎞ 구간에 조성됐다. 낮에는 누구나 오가는 평범한 산책로가 밤이면 황홀한 빛의 정원으로 변신한다. 정원 곳곳에서는 동피랑과 서피랑에서 사라진 벽화들이 다시 살아 움직인다. 15개 테마공간에서 펼쳐지는 화려하고 실감나는 미디어아트와 음악, 디지털 기술이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
디피랑이 문을 열면서 통영의 밤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개장 이후 한 해 평균 17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23~2024 한국관광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左) 통영시민문화회관 벽면을 캔버스 삼아 통영 자개 문양을 활영한 미디어쇼가 한창이다. (사진. C영상미디어)
右) 어둠 속에서 ‘디피랑’의 수호신인 ‘피랑이’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나 관람객을 반긴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눈과 귀가 즐거운 빛의 향연 저녁 7시, 디피랑의 문이 열린다. 동계 시즌인 10월부터 2월까지는 저녁 7시에 문을 열고 자정에 문을 닫는다. 긴 줄을 따라 입구로 가는 길, 이미 눈과 귀가 즐겁다. 디피랑 입구 맞은편에 있는 통영시민문화회관 벽면을 캔버스 삼아 화려한 영상쇼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통영 자개 문양을 비롯해 다양한 영상이 이어진다.
디피랑은 매표소가 있는 디피랑산장에서 시작해 ‘이상한 발자국’, ‘캠프파이어’, ‘잊혀진 문’으로 이어진다. 디피랑의 도입부로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길을 따라 야광 페인트로 형형색색 흔적을 남긴 ‘이상한 발자국’, 디피랑으로 가는 마지막 준비 공간인 ‘캠프파이어’를 지나 ‘잊혀진 문’에 다다르면 본격적인 탐험이 시작된다.
어두컴컴한 숲에서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디피랑의 수호신 ‘피랑이’가 닫혀 있던 문을 열어준다. 순간 거대한 문이 화려한 빛으로 뒤덮이고 음악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른다. 진짜 신비한 탐험을 떠나는 주인공이 된 것 같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 화려한 빛줄기가 쏟아지는 ‘반짝이 숲’이 나타난다. 황홀한 풍경에 놀랄 새도 없이 거대한 나무 조형물을 캔버스 삼아 붉은 동백꽃이 피어오르는 미디어아트가 펼쳐진다. 은하수 사이를 걷는 듯한 ‘빛 그물’의 반짝임도 환상적이다.
시원한 ‘신비폭포’를 지나면 디피랑 최고의 감동을 선사하는 ‘비밀공방’에 이른다. 낮에는 배드민턴장으로 사용되는 공간인데 밤이면 미디어쇼가 펼쳐지는 캔버스로 변신한다. 프로젝터 18대를 이용해 사방 벽과 바닥을 뒤덮은 신비스러운 입체 벽화는 넋을 잃게 만든다. 통영을 대표하는 예술가 전혁림 화백과 김종량 자개 장인의 작품을 재해석해 통영만의 색을 살린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천장이 뚫려 있어 밤하늘마저 작품의 일부가 된다. 관람객들은 벽에 기대어 앉아 밤하늘과 영상을 감상하기도 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이곳에서 오래 시간을 보낸다.
거대한 나무 조형물을 캔버스 삼아 동백꽃이 피는 미디어아트가 펼쳐지는 ‘오래된 동백나무’. (사진. C영상미디어)
통영의 밤에 예술을 더하다 이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는 ‘메아리마을’, 안개와 조명을 이용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빛의 오케스트라’를 지나면 드디어 ‘디피랑’에 이른다. 동피랑과 서피랑에서 사라진 벽화들이 다시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디피랑의 진가를 만날 수 있다. 영국의 고대 유적 스톤헨지를 닮은 조형물을 캔버스 삼아 동피랑과 서피랑의 옛 벽화들이 미디어아트쇼를 펼친다. 이렇게 다양한 테마공간을 경험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난다.
다른 콘셉트와 홀로그램, 프로젝션 매핑, 조명 등 첨단 미디어나 특수효과를 잘 활용해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체험하며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품 분위기를 고조하는 음악은 통영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과 남해안 별신굿의 ‘삼현’ 가락을 변주한 오케스트라 음악이다. 음악에도 귀를 기울이며 디피랑을 즐겨볼 것을 권한다.
左) 거대한 나무 조형물을 캔버스 삼아 동백꽃이 피는 미디어아트가 펼쳐지는 ‘오래된 동백나무’. (사진 C영상미디어)
右) 통영의 마스코트인 ‘동백이’와 동백꽃으로 꾸며진 서피랑으로 가는 계단길. (사진. 통영시청)
주민들이 지킨 벽화마을 새단장 디피랑의 여운은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이어갈 수 있다. 강구안을 내려다보는 동피랑은 통영의 대표적 야경명소 중 하나지만 낮에 보는 풍경도 인상적이다. 언덕과 좁은 골목 사이를 채운 벽화와 아늑한 마을 풍경이 정겹다. 마을 꼭대기에는 조선시대 통영성을 방어하기 위한 포대가 있던 동포루가 있다.
동피랑 마을은 통영의 대표 달동네였다. 2000년대 초 통영시는 낙후한 이 마을의 집들을 사들여 철거한 뒤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주민들과 시민단체가 나서 벽화전을 열었고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통영시는 철거 계획을 취소하고 마을을 보존하기로 했다. 이후 2년마다 벽화를 단장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동피랑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올해로 제9회를 맞은 동피랑마을 벽화조성사업은 10월 초 작업이 마무리됐다. 동피랑에 그려진 벽면 73곳 중 25곳, 신규 8곳을 추가해 총 33곳으로 5000㎡에 이르는 벽면을 새단장했다. 통영의 예술가명화, 강구안과 구도심 전경, 해양스토리와 포토존 등이 새롭게 관광객을 맞는다.
서피랑 마을은 2013년부터 주민들이 골목 곳곳에 예술작품을 설치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언덕배기 마을로 이어진 서피랑99계단은 그림이 그려지면서 그 자체가 예술작품이 됐다. 서피랑에선 통영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 생가와 ‘김약국의 딸들’의 실제 배경이 된 마을 등 근현대 문학의 발자취를 좇아 문학동네로도 조성됐다. 서피랑99계단도 박경리 작가를 테마로 만들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작가의 작품 속 문구를 감상하는 것도 또다른 재미다. 천재 화가 이중섭의 작품 ‘선착장을 내려다본 풍경’이 그려진 곳도 서피랑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통영 야경은 일품이다. 항구도시 통영만의 고즈넉하고 서정적인 풍경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