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만주 하얼빈역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안중근 의사가 쏜 총소리였다. 이토는 안 의사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안 의사는 이토를 처단한 후 곧바로 체포돼 일본 관헌에 넘겨졌다. 뤼순감옥에 수감된 안 의사는 일제의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사형을 선고받았고 1910년 3월 26일 31세 나이로 순국했다. 안 의사는 국권이 회복되면 유해를 조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일제는 안 의사의 유해를 유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비밀리에 형무소 뒷산에 매장했다. 안 의사의 유해는 광복 80주년을 맞은 현재까지도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 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제106주년 3·1절을 맞아 안 의사의 삶과 정신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서울 중구 남산공원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하 기념관)’을 찾았다. 2010년 문을 연 기념관은 광복 80주년 3·1절을 맞아 디지털 전시물을 대폭 확대하는 등 재단장을 마치고 3월 1일 재개관했다.
국가보훈부는 2024년 10월부터 윤봉길의사기념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의 디지털 전시공간 조성사업을 진행해왔다. 2월 24일에는 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재개관했고 백범김구기념관은 4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광복 80주년 3·1절을 맞아 디지털 전시물을 확대해 재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과 디지털 영상.
남산공원에서 만나는 안중근의 삶 수도권 전철 4호선 회현역에서 옛 남산 힐튼호텔 뒤편을 지나면 백범광장이 나온다. 백범광장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이곳에서 1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이 있는 남산공원에선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과 공간을 자주 찾을 수 있다. 남산공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식민 지배의 상징으로 건립한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다. 아픈 역사의 흔적 위에서 만나는 독립 영웅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기념관 앞에는 재개관을 기념하는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안 의사 동상과 유묵(遺墨·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을 새긴 기념비도 눈에 들어왔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유리로 된 12개의 직사각형 기둥을 이어놓은 듯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09년 안 의사와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한 12인을 상징한다.
기념관 입구는 지하 1층에 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로비에 있는 안 의사의 대형 동상과 마주하게 된다. 기존에는 안 의사의 좌상 뒤로 ‘대한독립’이라고 쓰인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안 의사가 11명의 항일투사와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왼손 약지를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을 새긴 것이다. 지금은 이 태극기 대신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화면을 설치해 안 의사의 유묵과 영상 등을 송출하고 있다. 크기만으로도 압도되는 안 의사의 동상과 다양한 영상이 어우러져 웅장함이 느껴졌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끊어 대한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진 안중근 1 의사의 수인(手印)과 글. (사진.C영상미디어)
독립운동과 단지동맹 이제는 전시실을 둘러볼 차례다. 지하 1층에 있는 제1전시실은 안 의사 출생 전후의 시대배경을 시작으로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안 의사 가문의 독립운동 등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안 의사는 1879년에 태어났는데 당시 조선은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이어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운동(1894), 청일전쟁(1894~1895),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러일전쟁(1904~1905) 등 역사적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안 의사는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함께 안 의사의 가족 이야기도 볼 수 있다. 안 의사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하얼빈 의거 이후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네가 항소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라는 말을 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 의사에 못지않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어머니를 따라 안 의사의 두 동생 정근, 공근 역시 독립운동에 나섰다. 다른 친인척들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동한 것을 볼 수 있다. 안 의사 가문은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독립운동가의 명가로 평가받는다. 3대에 걸쳐 총 16명이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전시는 1층에 있는 제2전시실로 이어진다. 이곳에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 의사의 삶과 국내에서의 교육·계몽 활동, 국외 망명 이후의 의군 활동과 단지동맹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1909년 11명의 항일투사와 단지동맹을 결성하는 장면을 재현한 화면이었다. 어두운 밤, 방 안에 모인 12명이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을 맹세했던 순간을 드라마처럼 연출했다.
1909년 11명의 항일투사와 ‘단지동맹’을 결성하는 장면을 드라마처럼 연출한 코너. (사진.강정미 기자)
하얼빈역에서 걸려온 전화 2층에 있는 제3전시실은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서 순국에 이르는 과정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하얼빈 의거 계획 과정부터 의거 장면, 법정 투쟁과 뤼순감옥을 재현해놓은 공간들이 이어진다. 이토가 탄 기차가 하얼빈역에 들어오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그를 저격하는 안 의사를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화면이 꺼지고 안 의사의 총에 쓰러진 이토와 주변 사람들을 재현한 모형 위로 조명이 켜진다. 디지털 화면과 모형을 활용한 드라마틱한 연출에 관람객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실제로 하얼빈 의거 장면을 찍은 영상과 안 의사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 등도 볼 수 있어 실감나는 전시였다.
하얼빈 의거 30분 전, 거사를 앞두고 안 의사의 심경과 각오를 들어볼 수 있는 ‘하얼빈역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코너도 인상적이었다. 1900년대 사용했을 법한 아날로그 전화를 들면 안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나는 이토를 기다리기 위해 하얼빈역 찻집에 있소. 이토를 제대로 알아보고 일을 거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오. 그러나 기회는 오직 이때뿐! (중략) 반드시 이 거사를 성공시켜 이 머나먼 외국 땅에서 당당하게 대한만세를 외칠 것이오. 아, 열차가 도착하고 있군. 이만 가보겠소.” 수화기 너머 두렵지만 반드시 거사를 성공시키겠다는 안 의사의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토를 저격한 15가지 이유를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재판 장면도 놓치기엔 아쉽다. 기존의 전시와 달리 영상으로 연출해 안 의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어 사형선고를 받고도 뤼순감옥에서 저술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 등의 저술, 유언을 남기는 장면,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남긴 유서 등 안 의사의 마지막 자취를 영상과 전시로 만날 수 있다.
제3전시실에서 나오면 기획전시실과 체험존이 이어진다. 기획전시실에선 서예가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안 의사의 유묵을 볼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바로 옆 체험존에서는 인공지능(AI)으로 재현한 안 의사와 대화하기, 안중근 유묵 찍어보기, 엽서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도 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