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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하고 풍후한 모습들

201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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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하고 풍후한 모습들
'최익현(崔益鉉)의 「한라산 유람기」'

    「한라산 유람기」는 조선 말기의 지사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강인한 정신, 치밀한 관찰력, 비판적 안목을 담아 작성한 글이다. 변화와 흥취를 대화(對話), 명시(名詩), 명구(名句)를 인용하여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최익현은 경기 포천 출생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면암(勉庵)이다. 1873년(고종 10) 겨울에 대원군을 탄핵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75년 사면되었다. 하지만 한라산에 올라보고픈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서 선비 이기남(李奇男)의 인도로 길을 나섰다. 어른 십여 명, 종자 오륙 명이 제주시를 떠난 것은 음력 3월 27일이고, 등반 후 최익현이유람기를 쓴 것은 그해 5월이었다.


 


베일에 싸인 신비한 산
    얼마 후 검은 안개가 컴컴하게 몰려오더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겼지만, 여기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더 붓지 않아서 구인(九?)의 높은 산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으므로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곧장 수백 보를 앞으로 나아가서 북쪽 가의 오목한 곳에 이르러 최고 높은 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중앙이 움푹 팬 구덩이가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백록담이었다. 둘레가 1리를 넘고 수면은 담담했으며, 반은 물이고 반은 얼음이었다.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줄거나 불지 않는데, 얕은 곳은 무릎이, 깊은 곳은 허리에 찼다. 맑고 깨끗하여 먼지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은연히 신선이 사는 듯하였다. 사방을 둘러싼 산각(山角)들도 높고 낮음이 모두 균등하니, 참으로 천부(天府)의 성곽이다. 석벽에 매달려 내려가서 백록담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잠깐 쉬었다. 일행은 모두 지쳐서 남은 힘이 없었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절정을 향해 조심조심 올라갔다. 그러나 따라오는 자는 세 사람뿐이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져 있어서 그리 까마득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위로는 별들과 아주 가깝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부상(扶桑)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을 접했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을 끌어당기고 있다.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은, 큰 것은 구름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여, 놀랍고 괴이해서 천태만상이다.
 
01.목련 뒤로 눈이 남아있는 한라산이 보인다.                                                 02.조선 말기의 지사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쓴 한라산 유람기
03.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의 남서쪽 산허리에 위치한 골짜기인 영실(瀛室)      04. 조선후기 문인화가 윤제홍이 그린 「한라산도」

    최익현이 「한라산 유람기」를 쓴 조선 말기에는 천하사람들이 모두 한라산이 명승이라고 알았지만 구경한 사람이 의외로 적었다. 한라산은 범상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영산이었다. 제주도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산은 4백 리에 뻗쳤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서 5월에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상에 있는 백록담은 여러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으로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항시 흰 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영주산(瀛州山)이라 일컫는 곳으로 삼신산의 하나에 속합니다. 그러니 범상한 사람들이 어찌 쉽게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최익현은 한라산이 백두산의 맥이 뻗어가서 이루어 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산은 백두산을 근원으로 하여 남으로 4천리를 달려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이 되고 또 남으로 달려 해남(海南)의 달마산(達摩山)이 되었으며, 달마산은 또 바다로 5백리를 건너 추자도(楸子島)가 되었고 다시 5백리를 건너서 이 산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한라산의 명칭에 대해서 어떤 이는 이 산이 지극히 높아 하늘의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 산은 성품이 욕심이 많아서 그 해 농사의 풍흉(豊凶)은 관장(官長)의 맑고 탁함을 보아 알 수 있으며 외래의 선박이 여기에 정박하면 모두 패하여 돌아가므로 탐산(耽山)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이 산의 형국이 동쪽은 말, 남쪽은 부처, 서쪽은 곡식, 북쪽은 사람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그 말들이 모두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되, 형국설(形局說)만 가지고 유사점을 논할 수는 있다고 보았다. 곧, 산세가 구부러졌다가 펴지고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해서 마치 달리는 듯한 것은 말과 유사하고, 아스라한 바위와 층층 벽이 죽 늘어서서 공읍(拱揖)하는 듯한 것은 부처와 유사하며, 평평하고 광막한 곳에 산만하게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유사하고, 북을 향해 껴안은 듯한 산세가 곱고 수려함은 사람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그는 그래서 말은 동쪽에서 생산되고 불당은 남쪽에 모였으며, 곡식은 서쪽이 잘 되고 인걸은 북쪽에 많을뿐더러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각별할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최익현이 ‘사방을 둘러싼 산각(山角)들의 높고 낮음이 모두 균등해 참으로 천부(天府)의 성곽’이라고 예찬한 백록담
 
부처의 모습을 한 바위들
    최익현은 한라산과 제주도에 대하여 이렇게 총평하였다. 이 산은 궁벽하게 바다 가운데 있어서 청고(淸高)하고 기운도 많이 차므로, 지기가 견고하고 근골이 강한 자가 아니면 결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산을 올라간 사람이 수백 년 동안에 관장(官長) 몇 사람에 불과했을 뿐이어서, 옛날 현인들의 거필(巨筆)로도 한 번도 그 진면목이 발휘된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호사자들이 신산(神山)이라고 허무하고 황당한 말로 어지럽힐 뿐이고 다른 면은 조금도 소개되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 이 산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모습이겠는가?
    한라산을 내려가면서 최익현은 백록담을 에워싸고 있는 석벽을 관람했다. 그것은 마치 대나무를 쪼개고 오이를 깎은 듯이 하늘에 치솟고 있는데, 기기괴괴하고 형형색색한 것이 모두 석가여래가 가사와 장삼을 입은 모습이었다. 최익현 일행은 노숙을 하고서 다음 날 새벽에 이른 아침을 지어 먹고 길을 떠났다. 옷과 버선은 지난밤의 이슬로 축축했다.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기도 했다. 마침내 영실(瀛室)에 이르니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우뚝우뚝한 괴석들이 웅장하게 늘어서 있어, 모두가 부처의 형태였다. 바로 천불암(千佛巖) 또는 오백장군(五百將軍)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산 밑 길가에는 얕은 냇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풀밭에 앉아서 얼마쯤 쉬다가 이윽고 출발하여 20리를 걸어 서동(西洞)의 입구를 나오니 영졸(營卒)들이 말을 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인가에 들어가서 밥을 지어 요기를 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성으로 돌아왔다.

 
01.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우뚝우뚝한 괴석들이 웅장하게 늘어서 있는 영실 풍경 
02. 우리나라 특산종인 구상나무가 정상 부근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외세저항의 강골한 기상이 담긴 글
    최익현은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해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다가 왜군에게 체포되어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당시 74세의 고령이었으나 단식을 하였다. 일본 정부는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서,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쓰시마에 조선의 쌀과 보약을 보내라고 훈령을 내렸다. 일본 병사들이 부산에서 쌀을 가져오자, 최익현은 사흘 만에 일단 단식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울화증과 풍토병 때문에 반년 뒤에 병사했다.
    19세기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혼돈과 고뇌의 시기였다. 그들은 동아시아를 축(軸)으로 한 인식 지형에 서양을 새로이 그려 넣어야 했고 이는 성리학의 가치질서와 세계관을 헝클어놓았다. 최익현을 비롯한 유림의 인사들은 기독교적인 만인평등과 사해동포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였다. 위정척사론의 저변에는 중세 봉건왕조를 떠받드는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외세저항은 곧 수구세력이 품고 있던 민족주의의 한 발로이기도 하였다. 그의 강골한 기상은 바로 이 「한라산 유람기」에서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