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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식구 이야기

2017-06-08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반려식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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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 식구를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이 녀석, 사실 처음에는 회색이었다. 때가 타서는 눈곱은 잔뜩 달고 길에 떠도는 것을 누군가 구조하여 선배 동물병원에 맡겼다 한다. 고양이의 보호자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병원 입원실을 차지하고 있기를 두어 달, 분양 보내기로 하였단다. 그런데 두 번이나 파양되었다. 이유는 털 빠짐. 가뜩이나 털을 많이 뿜어내는 체질인데다가 털 길이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애매한 중간 길이로 타고 나 온 집을 털북숭이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나에게 왔다. 2007년 5월. 2세 추정. 사람 나이로는 청년이다. 



    재미삼아 반려인을 cat person과 dog person 두 부류로 나누곤 하는데, 고양이를 선호하는 cat person은 독립적이고 창의적이며 개인적인 이미지, 개를 선호하는 dog person은 활동적이고 우호적이며 유대감이 강한 이미지가 있단다. 이게 별로 들어맞지는 않지만 고양이를 좋아하는 고양이파와 개를 좋아하는 개파가 뚜렷이 나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푸들만 4마리를 키웠던 온전한 개파였다. 돌이켜 보면 고양이를 별로 접해 보지도 않은 내가, 두 번 파양될 정도라는 이 아이를 겁도 없이 어떻게 데려올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기억은 나지 않아도 아마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숙고했다고 당시의 나는 자평했을 것 같지만. 어찌어찌 데려온 이 천덕꾸러기는 오는 날부터 태연히 내 집을 제 집처럼 쓰며 스스로 주인님이 되었고 나는 집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나는 검은 옷을 못 사게 되었지. 
    이 아이는 한결같이 당당했다. 버림받은 적 한 번도 없는 것처럼. 제 자고 싶을 때 잤고 먹고 싶을 때 먹었다. 친한 척 무릎 위에 앉아 있다가도 모르는 사람 본 듯 도망도 간다. 그리곤 네 마음이 일기 전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더라. 인간관계의 홍수 속에서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웃는 방법을 배워가던 시절이다. 진실한 나는 보여지는 나보다 훨씬 못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진실한 나는 보여지는 나에게 목소리 내지 못하던 풋내기 시절. 나는 별 믿는 구석도 없이 도도하고 자기중심적인 네 모습에 반했다. 누구도 개의치 않아하는 네 모습에 나를 투영했다. 속이 시원했다. 너랑 있으면 나도 그렇게 당당하고 멋져질 듯했다. 그렇게 조용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내가 밥 먹을 때 오독오독 저도 밥 먹고. 이따금 숙취가 아무리 심해 누워 앓아도 네 밥은 챙겼다. 나 밖엔 못 주니까. 시험 전날 밤샐 때면 너 항상 무릎에 올라와 잤다. 응원하거나 혹은 약 올리는 듯이. 나 자려 누우면 저도 들어오게 이불 들춰 달라고 야옹야옹 울었다. 그러다 아침에 깨어 근처에 너 있으면 깨울까 봐서 옴짝달싹 못하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아침에 참 못 일어나던 나로서는 좋은 늦잠 핑계였다. 
    개만 길러왔던 나는 사실, 네가 까칠하고 길들여지지 않았으며 제멋대로에 통제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지금에야 네가 그래도 애교가 꽤 많은 편이고 낯가림도 없으며 개들과는 표현 방식이 조금 달라서 그렇게 느껴졌었단 걸 알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으니까. 혹시 반려인이거나 혹은 자녀가 있는 분이라면 이해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과 사랑 주는 것으로 완전히 나뉘어 있으며 그걸 깨닫는 때는 주로 온전히 사랑을 주기만 할 때라고. 다행이다, ‘고양이 반려’에서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의 지분이 거의 없는 것이. 무언가, 누군가를 책임져 본 적 없던 나는 통제라는 말이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네 덕분에 알았다. 보호를 주장하는 나로 인해 네가 많은 것들에서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천천히 알아갔다. 



    그렇게 어느새 11년 차 집사가 되었다. 수의사가 되고. 그리고 너는 12살이 되었다. 12살. 완연한 노년이다. 사람 나이로는 어쩌면 70세. 너는 이빨도 꽤 빠지고 위장도 약한 할머니가 되었다. 기어코 일전에는 호흡 정지까지 왔었다. 그 1-2분간이었던 찰나, 나는 급작스럽지만 냉정하게 마음속에서 널 떠나보냈었다. 천운으로 응급처치를 통해 네 숨이 돌아오고 나서야 맥이 풀려 눈물이 났다. 많은 생각을 했다. 누가 누굴 떠나보낸다는지. 11년. 이제는 너를 알았을까. 어미로부터의 독립 과정을 겪지 못한 너는 여전히 정서적으로는 아기 고양이다. 먹이와 잠자리를 내게 의존한다. 구역을 공유한다. 이건 나로 인한 부자연스러움일까. 나에게 너의 일생을 결정할 권리가 있었을까. 동류의 불행을 찾아내며 서로의 삶을 어루만진다 생각한 것은 실은 나뿐이지 않을까.
    시간이 달랐다. 나에겐 턱의 수염 자국이 조금 짙어졌을 뿐인 시간에 너의 일생이 흘렀다. 느낀 바와 달리 나 변화에 용감하지는 않아 너를 끝까지 반려할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하면 마음이 무거워진 다는 건 너도 알 테니까. 여전히 아침마다 네 이마를 쓰다듬고 출근하여서는 모든 아이들이 너인 것처럼 돌볼 생각이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서서히 떠나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준비할 수 없는 그날을 어렴풋이 각오는 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까탈스런 너와 나의 내일이 여전히 희망찬 까닭은, 어찌 되든 정들지 않는 지난 시절들을 여전히 까탈스럽게도 미워하는 바람에, 그래서 아직 쓰이지 않은 내일이 그나마 우리 시절 중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