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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최초의 3.1만세운동 주도

2020-03-10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충북 최초의 3.1만세운동 주도
'괴산 홍명희 생가'

    대하 장편 역사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흔적이 충북 괴산군 괴산읍 일대에 남아있다. 충북 최초의 3.1만세운동을 준비했던 동부리 생가와 서부리에 있는 만세운동유적비, 그가 살던 제월리 집, 그의 문학비가 있는 제월대, 그리고 제월대를 휘감아 흐르는 괴강 물줄기 등 홍명희의 발길을 따라 문학기행을 떠났다.
 
괴산읍 서부리 동진천 수진교에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함께 있는 만세운동유적비. 이곳에 벽초 홍명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세운동유적비와 느티나무
    1919년 3월 19일 충북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에 모인 600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기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충주에 지원을 요청했고, 충주에서 파견된 수비대에 의해 군중은 해산됐다. 충북 최초로 일어난 3.1만세운동이었다. 
    만세운동은 그날 하루에 그치지 않았다. 3월 24일에는 700여 명, 3월 29일에는 1천500여 명, 4월 1일에는 1천여 명이 들고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온 세상에 그 기세를 떨쳤다. 그 중심에 벽초 홍명희가 있었다. 괴산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불씨는 청주를 거쳐 충북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괴산읍 서부리 동진천 수진교 남단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그날의 일을 돌에 새긴 만세운동유적비가 있다. 유적비에 3.1만세운동을 주동한 여러 인물 중 벽초 홍명희의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괴산의 3.1만세운동을 준비했던 곳이 벽초 홍명희가 태어나고 자란 동부리(옛 지명은 인산리다.) 집 사랑채였다. 그는 이곳에서 만세운동에 필요한 조직을 꾸리고 선언문을 만들었으며 소품을 준비했다. 홍명희 생가는 만세운동유적비에서 약 450m 정도 떨어진, 동진천 건너편에 있다.   
    홍명희가 태어난 집은 현재 홍범식 고가라는 이름으로 충청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됐다. 홍범식은 홍명희의 아버지다. 그는 1909년 금산 군수가 됐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하자 자결, 순국했다. 그는 유서에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아들 홍명희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홍명희는 중국 상해에서 박은식,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으며 항일운동단체인 신간회에도 참여했다.

 
충북 최초의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홍명희의 생가. 그는 이 사랑채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동부리 생가와 제월리 집
    홍명희가 3.1만세운동을 준비했던 동부리 집은 조선시대 영조 임금 때인 18세기 초중반에 지어졌다고 한다. 1800년대 중반에 증축됐다. 집터는 1천평이 넘었고 방은 20여 칸이 넘었다. 1920년에 주인이 바뀌면서 집 내부가 조금씩 바뀌었다.  
    2002년 괴산군에서 매입하여 2008년까지 안채, 사랑채, 광채 등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없어진 건물과 화장실 등을 다시 세웠다. 현재 안채, 사랑채, 아래 사랑채, 중문, 대문채, 장독대, 광채, 뒤주, 김치 광, 화장실 등이 복원됐다. 
    고택의 돌담과 기와지붕이 어울려 따듯한 정서를 자아낸다. 겹겹이 겹친 기와의 곡선이 아름답다.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마당에 고인 햇볕을 바라본다. 안채 뒤란 장독대 항아리에도 햇볕이 고즈넉하게 고였다. 그렇게 천천히 걸으며 고택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사람 살지 않는 빈 집에 온기를 불어넣는 건 이곳을 찾아 홍명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예닐곱 살과 서너 살 돼 보이는 두 아이를 만난 건 홍명희 생가 사랑채 마당이었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가득 찬다.
    괴산 3.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홍명희는 1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된다. 1920년 옥에서 나온 홍명희는 동부리 집을 떠나 제월리 집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그는 제월리 집에서 1924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현재 제월리 365에 가면 홍명희가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표석을 볼 수 있다. 표석이 있는 터가 제월리 집 본채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빈 터 옆에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있다. 문 없는 돌담이 정겹다. 마루 아래 신발 한 켤레가 놓였다. “실례합니다. 계세요?”라며 여러 차례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집밖에서 표석을 바라보고 돌아섰다. 집터 앞에 펼쳐진 마을 들녘과 먼 곳에 드리운 산 능선을 홍명희도 보았을 것이다.

 
제월대에 있는 고산정
 
홍명희의 발길을 따라 제월대와 고산정을 돌아보다
    홍명희는 대하 장편 역사소설 <임꺽정>을 1928년부터 십여 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임꺽정은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부터 정조실록까지 7번 등장한다. 그 중 ‘도적의 괴수 임꺽정(林巨正)’이라는 표현도 있다. 
    홍명희는 소설에서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다양한 계층, 다양한 신분의 인물을 통해 당대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에서 임꺽정은 도적의 괴수가 아니라 조선시대 계급사회의 하층민을 위해 살아가는 의적이 된다.  
    실존 인물 임꺽정의 이야기는 큰 인기를 끌었다. 해방 직후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글의 분량이나 내용으로도 다른 작품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최고의 대하소설로 인정받았다.  
    홍명희는 광복 이후 1948년 4월 10일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가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홍명희의 이름은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잊혔다. 그의 문학과 생의 자취를 들추는 일은 금기였다. 1988년 월북 및 납북 작가의 작품이 해금 되면서 주옥같은 작품들이 쏟아졌다. 그 중 <임꺽정>도 있었다.  
    홍명희가 살던 제월리 집에서 ‘벽초 홍명희 문학비’가 있는 제월대로 향한다. 제월대 주차장 한 쪽에 문학비가 있다. 홍명희의 월북과 북한에서 활동한 경력 등으로 인해 문학비 건립을 놓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대립했다. 진통 끝에 1998년 10월에 만들어진 비문의 내용을 바꾸어 2000년 가을에 현재의 비문이 완성 됐다. 문학비는 ‘괴산 고산정 및 제월대’라는 이름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 된 곳에 있다. 
    문학비 앞 주차장 한쪽에 고산정 정자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보인다. 길은 숲 안으로 이어진다. 
    고산정에 올라가면 괴강 물줄기가 굽이치며 흐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제월대 절벽 위에 지어진 고산정은 조선시대 선조 29년 충청도 관찰사 유근이 지은 정자다. 유근은 이곳에 만송정과 고산정사를 짓고 광해군 때 낙향하여 은거했다. 숙종 2년에 고산정사는 불타 없어지고 만송정만 남았는데 이를 고산정이라 고쳐 불렀다. 
    정자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강가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다. 홍명희도 이 길을 따라 강가로 내려갔을 것이다. 제월대을 안고 굽이쳐 흐르는 괴강 물줄기 앞에서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구상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