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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같은 충절, 물을 닮은 풍류를 노래한 사람들

2020-07-21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산같은 충절, 물을 닮은 풍류를 노래한 사람들
'제천 권섭과 원호'

    아름다운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에 담은 조선시대 사람 권섭의 눈길로 제천의 풍경을 바라본다. 생전에 남긴 3천 편이 넘는 한시와 시조 75수, 가사 2편의 양만 봐도 그는 당대에 으뜸가는 시인이었을 것이다. 물처럼 바람처럼 떠돌며 시를 남긴 권섭의 흔적을 찾아본다. 제천에는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었으니 단종을 향한 충절의 마음이 산 같았던 원호가 그 사람이다.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관란정에서 굽이치는 강물을 바라보며 옛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본다.
 
박달도령과 금봉이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박달재 조형물
 
박달재에 울려 퍼지는 사랑가
    굽이도는 산길을 그르렁거리며 올라가는 완행버스 뒤로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금세 멈춰서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낡은 버스가 힘겹게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색 바랜 신문지 같은 유행가 가락이 공중에서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충주에서 제천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박달재를 처음 넘었던 40여 년 전 기억이다.
    그 노래가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걸 알게 된 때는 세월이 한참 흐르고 난 뒤였다. 노랫말에 나오는 금봉이가 떠나는 임의 허리춤에 달아주던 도토리묵 때문인지 그곳에는 도토리묵을 파는 식당이 유명했었다. 휴게소 상점도 있었지만 도토리묵을 파는 식당이 더 유명했었다.(지금 그 식당은 없다.) 
    임 향한 일편단심, 금봉이의 사랑은 미완으로 완성된 이야기다. 그 사랑가가 골골이 스며든 그 고갯길에 지금은 산책길도 났고, 정자도 있다. 금봉이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박달재 노래비와 금봉이와 그의 임으로 설정된 박달도령의 상이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로 남는다.
    박달재의 원래 이름은 이등령이다. 이 고개를 넘나들던 경상도 선비 ‘박달’과 이곳에 살던 ‘금봉’이라는 처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때문에 박달재가 됐다는 설이 있다. 만남과 헤어짐 기다림과 그리움이 옹이처럼 박힌 세월, 죽어서 다시 만난다는 그 둘의 사랑이야기가 박달재에 지금도 흐르고 있다. 박달과 금봉이 실제 인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이야기는 애절한 사랑가가 되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것이다.

 
(左) 옥소고 옥소장계에 실린 황강구곡가     (右) 문암영당
 
물처럼 바람처럼 세상을 흐르며 남긴 권섭의 시들
    박달재를 넘으면 산천의 경계를 넘나들며 산수를 사랑했던 조선시대 사람, 권섭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충북 제천시 신동 176, 문암영당. 이곳은 권섭 시대 전후의 안동 권씨 집안 인물 몇 사람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자 권섭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권섭은 한양에서 태어나 인생의 반을 한양을 축으로 활동했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 상소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정신적 스승이었던 송시열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어 그 자리를 대신한 큰아버지인 권상하의 사사(賜死)와 유배(流配)를 보고 그는 정치에 미련을 버린다.
    마흔 넘어 자리 잡은 청풍, 권섭은 그곳을 중심으로 산천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를 남긴다. 생전에 그가 남긴 3천 편이 넘는 한시와 시조 75수, 가사 2편, 방대한 그의 작품이 그를 말하고 있다. 그가 남긴 문학작품이 담긴 옥소고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364호로 지정됐다.
    청풍에는 그의 큰아버지인 권상하가 칭송한 아름다운 풍경 아홉 곳이 있었다. 그를 두고 ‘황강구곡’이라 했다. 권섭은 그 아홉 가지 풍경에 대해 글을 남겼다. 그것이 옥소고 옥소장계에 실린 ‘황강구곡가’다. 그중 하나 ‘능강동’ [八曲(8곡)은 어드메오 凌江洞(능강동)이 맑고깁희/琴書四十年(금서-책과 거문고- 사십 년)의 네 어인 손이러니/아마도 一室雙亭(일실쌍정)의 못내 즐겨 하노라] 지금의 충북 제천시 수산면 능강 계곡 일대를 보고 지은 시다.
    청풍의 누각 한벽루는 많은 시인 가객들의 붓을 탄 곳인데, 권섭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는 한벽루에서 본 풍경을 세상에 골고루 나누어주고 싶다고 읊었으며, 누각 아래 흐르는 강물에 근심을 다 띄워 보내니 벽오동에 내린 달빛에서 청명한 가을을 먼저 보았다는 시를 남겼다.
    이는 시인 조지훈이 수원 용주사에서 승무를 직접 보고 쓴 시 <승무>의 한 구절, ‘오동잎 잎새 마다 달이 지는데…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와 어딘가 닮았다. 권섭이 본 것은 정치권력의 덧없음을 승화한 소쇄(기운이 맑고 깨끗하다)의 뜻이고, 조지훈이 본 것은 슬퍼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니, 시에 나타난 두 사람의 성정이 결백으로 하나다.

 
관란정
 
푸른 강물 되어 굽이치는 임 향한 일편단심
    문암영당에서 북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17㎞, 굽이치며 흐르는 물줄기에서 솟은 절벽 위에 임을 향한 한 사람의 굳은 마음이 서려 있는 곳이 있다.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관란정 앞에 서면 평창강 푸른 물줄기가 휘돌아 흐르는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 물줄기를 따라 20여㎞를 흘러가면 강원도 영월 청령포가 나온다. 삼촌인 세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끝내 죽음으로 내몰린 조선의 여섯 번째 임금 단종, 그가 유배됐던 곳이 청령포다.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되자 청령포를 휘감고 흐르는 물줄기 상류에 집(관란재)을 짓고 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는 원호의 흔적이 관란정 일대에 남아 있다. 그는 관란재 앞 강가에서 단종을 생각하며 시를 짓고 글을 썼다고 한다.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과 열매를 박통에 담아 청령포로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관란정 앞 작은 비석에 그가 남긴 시 한 편이 새겨졌다.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물어 거슬러 흐르고자 나도 울어 보내도다. … 이곳은 귀양 온 곳 달밤에 혼백은 어디에서 노는고’ -청구영언-
    원호는 생육신(살아서 단종을 향한 충절을 지킨 6명의 신하)의 한 사람이다.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원호는 영월에 가서 3년 상을 치렀다. 훗날 세조가 원호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불렀으나 은거하다 생을 마쳤다.
    단종을 위한 충절을 지킨 원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가 단을 세우고 청령포에 있는 단종에게 절을 올렸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정자가 관란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