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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아픔도 다 품고 써내려가는 한편의 시

2020-12-15

라이프가이드 라이프


충북문학기행
사랑도 아픔도 다 품고 써내려가는 한편의 시
'영동'

    송호리 송림에 신라 사람들이 지은 ‘양산가’ 시비(노래비)와 시인 권구현, 이영순의 시비가 있다. 한국전쟁 때 250~300명의 양민이 미군에 의해 피살된 노근리 사건을 내용으로 한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의 배경무대인 노근리에는 지금도 그날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시를 적은 항아리가 사람을 맞이하는 황간역은 시의 세상으로 떠나는 출발역이다.
 
양산가 시비(노래비)
 
‘양산가’의 무대 송호리 송림
    [655년 태종무열왕은 백제와 고구려가 막고 있는 변방을 치기 위해 군사를 보냈는데 흠운을 낭당대감으로 삼았다. 백제 땅에 도달하여 양산 아래에 군영을 설치하고, 나아가 조천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백제군이 밤을 타고 달려왔다. 동틀 무렵 보루를 기어올라 들어왔다. 화살이 소나기 같이 퍼부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군과 백제군의 양산전투에 대한 내용이다. 신라의 김흠운이 이끄는 군대가 백제 땅 양산 금강 가에 진을 쳤다. 백제의 수도 사비로 가는 길목에 반드시 공략해야 하는 조천성을 치기 위해서였다. 이 전투에서 김흠운은 전사했다.
    김흠운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였다. 신라 사람들은 김흠운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와 노래를 지었다. 그게 바로 ‘양산가’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송호리 금강 가 솔밭에 ‘양산가’를 새긴 시비(노래비)가 있다. 시비(노래비)에는 한문으로 된 양산가와 이를 국역한 내용, 노래로 구전되던 내용이 새겨져있다.
    [도야지 같은 원수의 나라/나의 조국을 침노하나뇨/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나라 위한 충정 어이 참으리/창을 메고 내 집을 멀리 떠나와/풍찬노숙 싸움터로다/…/장하도다 나라 위해 목숨 바쳤네/…/천추에 빛나는 호국의 영령/길이길이 명복을 누리옵소서] -국역한 양산가 중 일부-

 
(左) 송호리 송림에 있는 권구현 시비     (右) 이영순 시비

    ‘양산가’가 새겨진 비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영동 출신 시인 권구현의 시비가 있다. 권 시인은 1898년 8월 영동군 양강면 산막리에서 태어났다. 1926년 시대일보에 ‘시조4장’을, 1927년 별건곤 2월호에 소설 ‘폐물’을 발표했다. 같은 해 시집 ‘흑방의 선물’을 발간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조직된 문학단체인 카프(KAPF)에 가담했다가 뜻이 달라 탈퇴하고 아나키스트가 되어 일제에 저항하며 시를 썼다. 송호리 송림 사이에 놓인 시비에 그의 시 ‘천동 숯장사’의 일부가 새겨졌다. 
    [외로운 별 하나/외로운 별 하나/떨어질 듯이 깜박이고 있는/천마령 높은 재를/이슬 찬 이 밤에 어찌나 넘으려노//우거진 숲 속에는/부엉이 소리마저 처량한 이 밤을/게다가 무거운 짐을 진 몸으로/혼자서 어찌나 넘으려노/구천동 숯장사야] 
    송호리 송림을 나서는 길에 영동 출신 이영순 시인의 시 ‘나비’가 새겨진 시비를 보았다. [나는 八月의 나비가 된다/神의 부드러운 입김을 속 입으며/동녘의 하늘을 난다/도라지꽃 피는 언덕 너머/사랑이 숨 쉬는 님의 품 안/눈을 감은 채 날개는 닿는다] 

 
(左) 노근리 평화공원에 있는 조형물 《모자상》     (右) 황간역 앞마당 시가 적힌 항아리 중 하나. 송찬호 시인의 시 '민들레역'이 적혀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역사, 노근리 사건
    발길은 노근리 평화공원으로 이어졌다. 노근리 평화공원 앞 냇물이 흐르는 쌍굴(개근철교)옹벽에 하얀색 페인트로 동그라미와 세모 모양을 그려 놓았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오른 주민들을 미군이 피살한 현장이다. 동그라미와 세모 모양은 그날의 총탄 자국을 알려주고 있었다. 
    쌍굴로 가기 전에 노근리 사건을 알려주는 안내판에서 그날의 역사를 보았다. 안내판에 적힌 글에 따르면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25일부터 7월29일까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철로 일대에서 마을 사람 250~300명이 미군에 의해 피살당한 사건이다. 1950년 7월23일 정오 무렵 영동읍 주곡리 마을 소개 명령에 따라 주곡리 주민들은 임계리로 피난했다. 7월25일 저녁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임계리, 주곡리, 타 지역 주민 등 500~600명)은 미군을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7월26일 정오 무렵 철길을 따라 걷는 피난행렬에 미군 비행기가 폭격하기 시작했다. 7월26일 오후부터 7월29일 오전 사이에 노근리 쌍굴(개근철교)에 피신한 피난민에 미군은 기관총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정은용 씨가 노근리 사건을 내용으로 한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화소설을 발표했다.
    노근리 평화공원 한쪽에 조형물들이 놓여 있었다. ‘모자상’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노근리 사건 당시 갓난아기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총탄에 맞아서 이미 숨진 엄마의 젖꼭지를 물고 있는 모습을 재현한 모자상이다. 

시의 세상으로 떠나는 출발역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노근리 평화공원을 떠나 황간역으로 향했다. 시를 적은 항아리가 전시되면서 황간역은 시의 세상으로 떠나는 출발역이 됐다. 역 건물 앞마당에 항아리가 즐비하다. 항아리 하나에 한 편의 시가 적혀 있었다. 
    액자와 표구에 걸린 시 보다 항아리에 적혀 역 마당을 꾸미고 있는 시가 더 빛나는 느낌이다. 시골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항아리는 우리 음식의 근간인 장류와 김치류, 곡식 등을 담는 용기다. 조상의 이름을 적어 모시는 신주단지도 항아리다. 일상생활에서, 집안의 조상을 기리는 것에도 항아리는 빠지지 않는다. 그런 항아리에 시가 적혔다. 항아리가 시도 품은 것이다. 
    황간역 앞마당에 즐비한 시가 적힌 항아리를 하나하나 짚으며 읽는다. 송찬호 시인의 시 ‘민들레역’이 눈에 들어왔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고삐가 매여 있지 않은 기관차 한 대/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철로변 꽃을 따먹고 있다//에구, 이 철없는 쇳덩어리/오목눈이 울리는 뻐꾹새야/ 쪼르르 달려나온 장닭 한 마리 기관차 머릴 쪼아댄다//민들레 여러분, 병아리 양말 무릎까지/끌어 올렸어요? 이름표 달았어요?/네.네. 네네네 자 그럼 출발!//민들레는 달린다 종알종알 달린다/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황간역 앞마당 항아리에 적힌 대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