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을 향유하다, 명승을 그리다 일찍이 당나라 문인 유종원(柳宗元)은 ‘난정(蘭亭)’의 명성이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행적과 맞닿아 있다고 하였다. 흔히 수려한 경관을 떠올리게 마련인 ‘명승’은 산수자연을 심미적 대상물로 인식한 동아시아 전통과 연계되며 역사적, 문명적 요소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또한 난정과 같은 객관적 장소가 명인과 조우함으로써 명승으로 거듭나는 양태를 보인다.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조식과 지리산, 이황과 도산 등 명승은 명인의 발자취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조선시대 문인 지식인들은 그와 같은 명승을 매개로 지적 탐구와 문예 활동을 즐겼다. 실제 명승을 향유하는 방식은 특정 명소를 직접 경영하거나 유람하는 형태와 시문서화를 통해 즐기는 간접적 방식이 공존하였다. 특히 기행시문과 명승도는 명승의 성립과 전승을 떠받치는 명승문화의 동력이자 핵심 성과물이었다. 이들은 언어표현과 시각효과라는 매체 고유의 특장(特長)을 살려 명승을 둘러싼 담론과 유희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양란 이후 17세기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의 면면이 가시화되고, 신익상(申翼相, 1634~1697)이 선물받은 《최락당팔경병풍도(最樂堂八景屛風圖)》처럼 조선 팔도를 아우르는 명승 그림이 등장하기도 했다. 각 폭의 내용은 경기도 개성 박연폭포, 충청도 단양 구담, 전라도 전주 한벽당, 경상도 봉화 청량산, 황해도 황주 월파루, 강원도 금강산, 평안도 평양 연광정, 함경도 안변 국도였으니 도별 대표 주자를 선정해 꾸민 셈이다.
명산과 명루 등으로 자연적, 인문적 경관이 섞인 8폭의 화제가 명승의 성격을 재확인시켜 준다. 18세기 이후에는 유람객의 증가와 더불어 기행 범위가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며 명승도 제작과 감상 풍조가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정착하였다. 동시기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이 재임 중 명승을 탐방하고 명승도를 제작해 환유지자(宦遊之資)로 삼는 일도 관습화되어 갔다. 이제 명승도는 기행시문과 함께 원유(遠遊)를 대신하는 와유(臥遊)의 수단이자 유람을 부추기는 자극제 혹은 길잡이가 되었다.
김홍도는 연풍현감 시절 돌아본 제천 옥순봉(명승) 일대 경관을 담은 <옥순봉>을 남겼다. 살아생전 국중(國中)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은 김홍도가 아취 있는 필묵미를 잘 살린 사례이다. 옥순봉은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 시절 죽순 모양을 닮은 암봉을 보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지금은 충주호의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봉우리 하부가 드러나 있는데, 선유하는 유람객이 그림 보는 재미를 더한다. 개화기 서양인 수집가에 의해 반출되어 영국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에 소장되어 있는 <영보정>은 충청수영성 안에 있는 누정과 천수만 일대 경관을 포착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세상에서 호수와 바위, 누정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보정을 으뜸으로 꼽는다”라고 상찬했던 명루로 수많은 문인묵객의 사랑을 받았다.
주변에 중국 강남지방 명승에서 명칭을 따온 황학루, 악양루, 한산사, 고소대 등이 자리해 명승문화의 자장(磁場)이 국경을 넘어 중국 대륙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한편 1878년에 소실된 영보정이 최근에 복원되었으나 그 형태가 화면 속 건물과 상이하여 명승도의 활용 방안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듯하다. 이처럼 명승도는 시공간을 초월해 ‘그때, 거기, 그들’과 소통하게 해 주는 시각적 기록물이자 예술작품이다.
미래 자산으로서 명승도의 순수 가치 주목해야 <통군정>은 한반도 서북단의 국경도시 의주에 있는 누정에 초점을 맞춘 명승도이다. 누정이 삼각산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서 압록강을 굽어보고 저 멀리 요동 땅까지 품을 수 있는 전망대이자 장대였다. 모든 물상이 눈에 파묻힌 한겨울의 의주성 일대 적막한 풍경이 인상적이다. 매년 동지사로 파견된 조선 사절단은 의주에 집결한 후 그림처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북경으로 향하곤 했다.
통군정을 비롯해 금강산과 박연폭포처럼 오늘날 북한 지역에 속하는 명승은 당장 마음대로 가볼 수 없는 형편이다. 이 지점에서 기록성과 재현성을 담보하는 명승도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배가된다. 분단 이전 하나의 영토, 하나의 문화 속에서 일구어 낸 명승문화를 과거의 유산인 동시에 미래 자산으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아울러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무색하게 급변하는 우리 시대의 ‘신박한’ 명승문화를 창출하는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