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5-1. 주연야화의 것대산 봉수대 봉수는 동서양의 많은 고대국가에서 사용하였던 통신 수단이었다. 중국 주나라 때 유왕은 그가 몹시 총애하는 포사의 웃는 얼굴을 보려고 거짓 봉화를 올리고 북을 크게 쳐서 제후들이 놀라서 달려오도록 하였다. 외적의 침입이 없었음에도 매번 거짓으로 올린 봉화를 보고 혼비백산 달려 왔다가 실망하여 돌아가는 제후들의 모습을 보며 포사는 깔깔대고 웃었다. 이를 본 유왕은 기뻐하며 연신 봉화를 올렸는데, 그 후 진짜 적군이 쳐들어와서 봉화를 올려도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는 봉수에 대한 일화가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봉수를 사용하였다. 612년에 수나라 양제의 조서에도 나타나 있는데, 고구려 군사가 변방을 자주 쳐들어오고 널리 차지하여 봉후(烽候)를 괴롭혔으므로 위급을 알리는 봉수로 몹시 시달렸다고 한다. 또 당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에 쳐들어올 때도 10리마다 1개의 봉수를 두고 태자와 약속한 뒤에 봉화를 올리고 침입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봉수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에서는 기원전 9년(온조왕 10)에 봉현(烽峴),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 등 봉수와 관련된 지명이 자주 나와 역시 오래 전부터 봉수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가야시대의 수로왕이 다스리던 가락국에서는 기원후 48년(수로왕 7) 7월 27일에 왕이 신하 유천간 등을 시켜 망산도에 나가서 바다 쪽을 지켜보게 하였는데,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을 향해 오는 배를 보고 횃불을 드니 이를 신호로 앞을 다투어 육지에 내려서 뛰어왔다고 하였다. 이 배에는 왕후 허씨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가락국에도 이미 남쪽 해안의 섬들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해안선에 접근하는 적선을 봉화로써 알렸고 이를 왕에게 보고하는 봉수통신망이 국방에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것대산 봉수 전경
660년(의자왕 20)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3년 후인 663년에 백제부흥군과 일본의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과 해전을 벌인 후 일본으로 들어갔는데, 나라가 생긴 이래 가장 큰 국난에 직면한 일본은 곧 쳐들어올 나당 연합군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을 서둘러서 664년부터 성곽과 봉수를 축조하였다. 이때 성곽도 그렇지만 봉수도 그 선지, 설계, 감리까지 백제의 망명 귀족들이 해주고 일본에서는 오직 인부만 동원하였다.
고려시대에 봉수는 더욱 발전되고 정비된 상태로 계속 유지되었다. 1123년(인종 원년) 6월 13일 송나라 사신 예부시랑 노윤적(路允迪)을 따라 개경에 온 서긍(徐兢)이 1개월 동안 머물면서 고려의 풍물을 보고들은 사실을 적은 『고려도경』을 보면, 송나라 사신들이 배를 타고 고려의 흑산도에 도착할 때마다 야간에는 항로 주변의 불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차례로 밝혀서 왕성까지 전달되어 도착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비록 체계적으로 확정된 봉화는 아니었겠으나 고려 전기에는 삼국시대보다 더욱 발전된 봉수제도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내준다.
1149년(의종 3) 8월 서북면병마사 조진약(曺晋若)이 상주하고 임금의 허가를 얻어 봉수의 법을 정했는데, 야화주연(夜火晝煙)으로 하되 봉수 홰(炬)의 수를 규정하여 평상시에는 야화(夜火)와 주수(晝燧)를 각기 1회, 보통 위급한 2급에는 각 2회, 정세가 긴급한 3급에는 각 3회, 정세가 초긴급한 4급에는 각 4회씩 올리게 하였다. 이때의 봉수소에는 오장(伍長)과 같은 하급 장교인 방정(防丁) 2명과 봉화대에서 직접 횃불을 올리거나 방어하는 근무병 내지 보초병인 백정(白丁) 20명을 배치하였다. 그들에게 각각 평전(平田) 1결씩 주어 가까이서 쉽게 오르며 농사짓게 하여 생활대책을 마련해 줌으로써 본업무인 봉수에 충실하게 하였다. 이는 각 봉수대에서 정세에 따라 올릴 홰의 수와 봉수를 지킬 요원의 배치, 경제적인 배경의 규정 등 봉수제 전반에 대한 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이후 원나라의 침입과 지배로 고려의 독자적인 봉수제도는 무너지고 원나라 군사의 봉수조직에 준하여 편성되었다가 원나라의 지배세력이 차츰 후퇴할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늘어나면서 고려의 봉수는 다시 강화되었다. 1351년(충정왕 3) 8월에 송악산 봉수를 설치하고 장교 2명과 봉수군 33명을 배치하였는데, 이 봉수대는 전국 각지에서 집결되는 중앙 봉수대의 역할을 하였고, 부근 주민의 보호와 자체 방호를 담당함은 물론 수도 방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왕조의 안정과 문화의 발흥이 이루어진 세종 초에 봉수의 설비와 제도가 정비되었다. 이후 국방에 대한 정책이 강화되어 세종 때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봉수의 법이 마련되어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등의 변화 속에 8로(八路) 봉수가 폐지되고, 다음 해 윤 5월 9일 각처 봉수대의 봉수군이 해산될 때까지 그 역할을 다하였다. 즉 조선의 봉수는 고려의 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당나라의 봉수제도를 참고로 하여 각 도의 연변봉수에 연대(煙臺)를 신축하는 등의 봉수대 시설기준과 봉군의 신분과 봉화의 홰의 수를 새로 정하였다. 또한 봉수의 선로를 일정하게 나누어 정했으며, 전에 있던 법령에다 당률(唐律) 또는 대명률(大明律)을 보완하여 우리나라만의 봉수제도 근간을 만들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