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10-4. 다시 찾아야 할 보물 무심천 남석교 문헌기록을 종합해 보면 “오봉원년” 창건설 이외에 현재로서 남석교의 초창시기를 알려주는 정확한 사료는 없다. 다만 남석교(대교)에 대한 기록이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153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돌다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남석교의 교두에 세워져 있던 법수(法首)가 ‘고려견’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고려시대에 축조되었음을 은연중 나타내준다. 용두사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낭성지』의 기록도 주목된다. 실제 청주읍성의 터에는 먼저 용두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국보 제41호의 용두사지 철당간이 이를 입증한다. 철당간의 규모로 보아 용두사의 사역이 꽤 넓었다고 추정한다면 읍성 내에 이와 같은 사찰이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절을 폐하고 읍을 세웠다는 기록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읍성을 축조한 시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으나 용두사가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되고 철당간의 건립연대가 고려 광종 13년(962)임을 감안할 때 그 이후 언젠가 청주읍성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남석교도 읍성의 축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세워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남석교가 청주읍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교량의 특성상 홍수에 의한 유실 또는 노후에 의한 붕괴 등으로 수없이 수·개축이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석교의 모습은 각종 고지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1760년(영조 36)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수록된「청주목지도」에 읍성의 남쪽으로 ‘대교천(大橋川)’과 함께 ‘남석교(南石橋)’가 표기되어 있다. 청주읍성의 서쪽을 끼고 돌아 북류하는 대교천은 그려져 있으나 남석교는 그림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지도는 남석교를 표기한 가장 오래된 지도로서 본문의 교량 조에는 ‘대교’라 소개하고 있으면서 같은 책에 실린 지도에는 ‘남석교’라 표기하고 있어 민간에서는 보통 남석교라 불렀음을 보여준다.
청주읍성도에 그려진 남석교
구례 운조루(중요민속자료 제8호)에 소장된 『여지도』 속의 「청주읍성도」를 살펴보면 청주읍성 내외와 그 주변의 상황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는 충청병영의 우후를 지낸 유억(柳億)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제작연대는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우후 벼슬을 하였던 유억의 활동시기와 이 지도의 뒷장에 나오는 청주지방의 지도를 「서원지도(西原地圖)」라 한 점으로 보아 대략 청주가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던 순조 26년(1826) 10월에서 헌종 1년(1835) 1월 사이로 보인다. 조선후기 청주지역의 상황을 가장 생생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채색지도에는 중앙에 청주읍성과 그 안팎의 각종 시설들이 매우 정확한 위치에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읍성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돌아 북류하는 무심천과 그 안쪽 제방에 능수버들이 촘촘하게 그려져 있고 서북쪽 무심천 밖에는 인공조림인 봉림수(鳳林藪)가 표현되어 있다. 무심천을 푸른색으로 채색하고 능수버들은 푸른 강물 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까지를 회화적인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어 수준이 높은 화가에 의해 그려졌음을 보여준다. 읍성의 동쪽은 우암산 줄기로 막혀 있는 가운데 향교와 민가들의 모습이 보이며 그 앞으로 읍성과의 사이에는 전답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역시 산수화와 같은 회화적인 필치로 그려졌다. 이 지도에는 청주읍성의 남문에서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상에 무심천을 가로질러 남석교가 그려져 있다. 석교는 상공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부감 기법으로 그렸는데 상판(床板)은 우물마루 형태이고 교각은 오른쪽(동쪽) 면의 석주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북쪽의 교두에는 양옆으로 석주가 세워져 있는데 석주의 정상부에 짐승모양의 법수(法首)가 올려져있어 현존하는 견상(犬像)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석교의 북쪽 끝에 세로로 ‘남석교’라고 표기하였다. 『여지도』의 「청주읍성도」 바로 다음에 붙여 수록된 「서원지도」역시 「청주읍성도」와 동시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도의 폭이 가로로 넓은 장방형 외곽선 안에 청주목 관할지역 내의 산과 물줄기 그리고 중요 시설과 건물을 상징적으로 그려 넣고 그 옆에 명칭을 써 놓았는데 중앙에 청주읍성이 위치하고 그 남쪽에 남석교가 표기되어 있다.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읍지』에 수록된 「청주목지도」에도 청주읍성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그 남쪽으로 ‘무성천(茂城川)’이라 표기된 내를 가로질러 판석을 가지런히 놓은 모양의 다리를 그려놓고 ‘석교’라고 표기하였다. 여기서 무성천은 곧 본문에 기록된 대교천이고 석교는 대교이다. 본문에는 대교천이라 해놓고 지도에는 ‘무성천’이라 한 것이 주목된다. 본문에는 보이지 않는 석교가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청주고지도」는 마치 실경산수화처럼 청주의 풍경을 그린 채색지도인데 여기에도 남석교가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남석교 위를 지나가는 행인과 법수까지 표현되고 다리 위에 남석교라 표기하였다.
발굴로 드러난 남석교 상판석
이밖에도 여러 고지도에 남석교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명칭이 ‘남석교’ 또는 ‘석교’라 표기된 것으로 보아 민간에서는 ‘대교’보다는 흔히 ‘남석교’라 불렸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지도』의「청주읍성도」와 『호서읍지』의 「청주목지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주고지도」에는 우물마루 형태로 결구된 상판석이 잘 묘사되어 있고, 특히 「청주읍성도」와 「청주고지도」에는 교두의 양옆에 세워졌던 법수 견상까지 그려져 있어 남석교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5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