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5-2. 주연야화의 것대산 봉수대 봉수는 대개 수 십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서로 바라볼 수 있어 연락할 수 있는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전보하던 것이다. 그 위치나 임무에 따라 경봉수, 연변봉수, 내지봉수의 세 종류가 있다. 경봉수는 수도 서울에 있던 봉수로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되던 중앙 봉수로서 서울 목멱산 즉 지금의 남산에 있던 목멱산봉수가 그것이다. 연변봉수는 국경선이나 해륙 연변의 제1선에 설치하여 연대라고도 불렀던 기점 구실을 하던 곳으로 통신 외에 국경의 초소나 수비대 역할도 하였다. 내지봉수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던 중간 봉수로서 문헌에 나타난 것만도 제주도 일원의 것까지 포함하여 전국에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이 623개소였다.
그런데 내지봉수는 그것이 전달될 때 한편에서 연락을 받아 다음 봉수로 연락을 해주던 선로가 있어 거미줄 같은 통신망이 이루어졌다. 그 기점이 변경인 두만강과 압록강,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5개 노선의 직봉으로 이루어졌고, 기점은 달라도 모두가 경봉수인 서울 목멱산을 종점으로 집결하였다. 이 직봉의 5개 선로를 살펴보면, 동북은 함경도의 경흥, 동남은 경상도의 동래, 서북의 내륙은 평안도의 강계, 서북의 해안지방으로는 평안도의 의주, 서남은 전라도의 순천 등 5개소를 출발점으로 하였다. 이밖에 간봉이라는 보조선이 있었다. 그 중에는 직봉 사이의 중간 지역을 연결하는 장거리의 것도 있고, 국경 방면의 전선 초소에서 본진 또는 고을 관아로 보고하는 단거리의 것도 있었다.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의 상당산성 남쪽 속칭 ‘봉화뚝’에 소재하는 것대산 봉수대는 조선의 각종 문헌기록에 보이는 거질대산봉수(巨叱大山烽燧)로 전국적인 봉수망 가운데 제2거 봉수노선에 딸린 간봉으로서 경남 남해의 금산(錦山)에서 출발한다. 우리나라 3대 기도처 가운데 하나인 보리암이 있는 산이다. 보리암 바로 뒤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남아 있다. 청주로 오는 봉수의 기점으로 일출 명소여서 등산객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것대산 봉수에서 바라본 청주시내 전경
남해를 뒤로 하고 경상도 서쪽 내지를 통해 북상하는데 그 노선을 따라 답사해 볼만하다. 즉, 남해 금산-진주 대방산-진주 각산-사천 안점-진주 망진산-진주 광제산-단성 입암산-삼가 금성산-합천 소현-거창 금귀산-거창 거말흘산-지례 구산-금산(김천) 고성산-황간 눌이항산-황간 소이산-영동 박달라산-옥천 월이산-옥천 환산-회덕 계족산-문의 소이산을 경유하여 이곳 청주 것대산 봉수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다시 진천 소을산-충주(지금은 음성) 망이산성으로 이어지고, 망아산성 봉수에서는 동래에서 출발하여 단양 죽령-단양 소이산-청풍 오치-충주 심항산-음성 가섭산 봉수를 통하여 북상하는 제2거 직봉 노선과 합류하여 죽산 건지산-용인 보개산-광주 천천현을 거쳐서 서울 목멱산 제2봉(烽)에 이른다.
고려와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이 것대산 봉수에서 공주의 월성산-공주 독성-연기 용수산-청주 저산으로 전달되는 제5거의 간봉 노선을 받아 진천 소을산봉수를 거쳐 서울로 전보하기도 하였고, 영동 박달라산에서 분기하여 청산 덕의산-보은 금적산-회인 용산점 봉수로 연결되었던 또 하나의 간봉 노선을 받기도 하였다. 즉, 것대산 봉수는 문의 소이산 봉수 외에도 흥덕구 강내면 저산리에 소재한 저산성 봉수와 보은군 회인면의 용산점 봉수 등 세 곳의 신호를 받아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 봉수를 거쳐 서울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것대산 봉수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처음 보인다. 거차대(居次大) 봉수가 청주의 동쪽에 있는데 남으로는 문의 소이산봉수, 북으로는 진천 소을산봉수와 호응한다고 하여 이미 조선 초기 또는 그 이전부터 봉수대가 설치되어 ‘거차대 봉수’로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것대산’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산의 동북쪽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 것대 마을이어서 마을 이름이 곧 산에 옮겨 붙은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순수 우리말 ‘것대산’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거차대(居次大)’ 또는 ‘거질대산(巨叱大山)’이 되었고,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봉수 아래의 고갯길을 ‘거죽령(巨竹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것’의 표기는 ‘居次’ 또는 ‘巨叱’로 쓰고, ‘대’는 발음대로 ‘大’로 쓰거나 대나무를 뜻하는 ‘竹’으로 쓴 것이다. 어쨌든 모두 것대산 봉수의 역사를 말해주는 중요한 기록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거질대산 봉수’라 표기하고 청주의 동쪽 11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여지도서』 등 조선 후기의 여러 읍지에는 위의 내용과 함께 이 봉수대의 주둔군으로 별장(別將) 1인, 감관(監官) 5인, 봉군(烽軍) 25명, 봉군보(烽軍保) 75명이 소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의 조사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충청북도 편에는 ‘사주면(四州面) 명암리와 낭성면 산성리의 경계에 있는데 충청북도의 모범림’이라고 하여 산림보호 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