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유전
'글. 이정연'

‘엄마처럼 살지 않기’는 내 마음의 벽에 걸어 둔 표어 같은 거였다. 썩거나 흠이 난 과일을 먼저 먹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고 아깝다고 해서 쉰내가 나는 밥을 물에 말아 먹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제 새끼들이 먹다 만 밥도 어찌 안 먹느냐?’라는 시어머니의 지청구를 꾸준히 못 들은 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로 산 옷은 걸어 두고 아끼는 게 아니라 많이 입는 게 투자가치를 회수하는 거라고 새 옷부터 부지런히 입었다. 심지어 생선조차 물 좋은 걸 냉동실 앞쪽에 두고 먼저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입지 않은 새 옷들과 우리가 드린 용돈이 고스란히 든 주머니를 안고 흐느끼던 순간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맞아 우리 어머니들은 너무 아끼고 희생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사셨어!’ 수긍하였고 어머니를 쏙 빼닮은 언니조차 ‘엄마도 진즉 우리처럼 살았으면’ 하고 자주 아쉬워하였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어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다짐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내 삶은 어머니의 끝없는 궁상에 가까운 절약이나 희생과는 비교적 거리가 있어 보였다. 늘 기분 좋게 물건을 소비하는 느낌이 들었고 내 삶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하는 가벼운 자만은 살림의 권태 같은 것쯤은 가볍게 물리쳐 주었다.





지난 토요일 다른 일 없으면 주말농장으로 놀러 오라는 언니의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황금빛 벼 이삭이 일렁이는 들판 위로 잠자리 떼의 군무가 아름다워 천국의 정원이 저럴까 싶게 황홀했다. 땅콩은 너무 많이 열어 한 포기를 들기도 버거웠고 알알이 여문 들깨는 이제 잎이 연노랑으로 물들어 장아찌 담기에 딱 좋았다. 열무는 보드랍게 손가락에 감기는데 물김치를 담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어 달려들어 애기 고추와 함께 고춧잎도 다 훑어서 봉지에 담았다. 고추밭에 드문드문 돋아난 고들빼기도 캐서 담고 사위도 안 준다는 가을 부추도 베서 가지런히 담아 놓았다.
저물도록 밭에 남아 싸놓은 보따리를 내려다보며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옛날 생각나지?” 언니도 고향 집 가을이 생각난 것이다. 가을이면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거두어들였다. 익은 고추는 따서 너럭바위에 널고 애기고추는 밀가루를 묻혀 쪄서 말리고 콩잎 깻잎은 소금물에 담그고 굵은 조약돌로 눌러 놓았다. 잘 익은 호박은 따서 방 윗목에 가지런히 놓고 애호박은 길게 돌려 깎아 처마 아래 장대에 걸어 놓았다. 동면을 앞두고 필사적으로 먹이를 물어 나르던 다람쥐같이 들판의 모든 것들을 물어 날랐다. 심지어 호박넝쿨조차 다 걷어서 썰어 말려 소먹이까지 비축해 놓고서야 우리의 추수는 비로소 끝이 났다. 아이들의 추수는 낮 동안이었지만 어머니의 추수는 첫눈 오는 밤까지 끝나지 않았다. 소도 별로 반기지 않을 것 같은 무는 썰어서 조금이라도 편평한 바위가 있으면 모두 점령해 널어놓았다. 별로 양식이 될 것 같지 않은 벌레 먹은 콩조차 골라서 따로 보관하셔서 쇠죽솥에 몰래 쏟아버린 씁쓸한 기억이 생채기처럼 쓰리다. 그때는 그저 어머니가 하는 일 모두가 구차하게만 보였다.





집에 돌아와 땅콩을 깨끗이 씻어 말리고 고들빼기며 부추도 다듬어 놓았다. 고추도 다듬어 냉동실에 넣고 한 장 한 장 깻잎을 모아 실로 묶는데 저만치 아이들과 남편이 그걸 보면서도 누구 하나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득 어릴 때 밤늦도록 깻잎을 모아 혼자 묶음을 짓던 어머니 얼굴이 동그랗게 깻잎 속에 떠오른다. “다 먹지도 못할 거 뭐 이렇게 자꾸 해?” 짜증 부리던 어린 나도 보인다. 꾸벅꾸벅 졸면서 깻잎을 가지런히 하는데 아이가
“그렇게 고단하면 좀 주무세요! 누가 다 먹는다고.” 짜증을 낸다.
놀라워라!
졸다가 개켜 놓은 깻잎마저 와르르 쏟아버린 어머니를 향해 참다못한 내가 내던 짜증과 어쩜 이리도 똑같을까. 도와주진 못할망정 원망 대신 나도 그때의 어머니처럼 빙그레 웃으며 깻잎 보따리를 저만치 밀쳐놓았다. 나는 어머니의 삶을 닮지 않으려 애썼지만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는 내 안에 계셨다. 미련에 가깝도록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예비가 자식을 가진 부모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생의 본능임을 알게 되기까지는 녀석에게도 적지 않은 세월이 필요하리라.

EDITOR 편집팀
이정연 작가
이메일 : manjuyeon1@hanmail.net
2003년 4월 수필문학 등단.
2004년 중부매일신문 세정유감코너 짧은 수필 집필 (1월-4월까지)
2004년 여름호 수필 ‘망월사에서’ 에세이문학 등단
2004년 영남수필 회원 –2019년
2006년~2008년 에세이문학 올해의 수필 20선 추천
에세이문학 수필과 비평 에세이21 수필사랑 대구문협지 다수 기고
2011년 - 현재 대구 달서구 현대힐공인중개사 소장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