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가이드

테마기행
초평천과 성암천에 흐르는 사람·마을·역사 이야기
'충북레이크파크 르네상스 : 진천1'

두타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잦아들며 초평천에게 물길을 내준다. 음성에서 시작된 초평천은 원남저수지에 모였다가 진천군 초평면 신통리로 흘러든다. 진천 땅에 흐르는 초평천 첫 물줄기다. 그 물길이 흐르다 군자천을 받아들여 너럭바위가 있는 대암 마을과 버드나무 고목이 마을을 지키는 금한 마을 앞을 지나 사행하면서 이윽고 초평호에 이른다. 지금까지 초평호 초롱길을 예닐곱 번 걸었다. 호수 위 공중에 놓인 출렁다리, ‘초평호미르309’는 이번에 처음 보았다. 진천 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성암천에는 보탑사와 김유신장군탄생지가 있지만, 성암천으로 흘러드는 실핏줄 같은 물줄기와 어우러진 황금박쥐마을, 보련마을, 용소마을 이야기가 살가워 마음이 더 쓰였다.

초평호를 건너는 출렁다리 ‘초평호 미르309’



초평천의 아침
가을비가 밤새 창밖을 어수선하게 하더니 아침부터 안개가 먼 산을 지웠다. 진천에 흐르는 초평천의 ‘처음’을 찾아 가는 길, 마을 위 민가 없는 길 낡은 다리는 저 혼자 물을 건너고 있었다. 골짜기는 깊었고 산등성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리 끝 밤나무를 돌면 길마저 흙길이었다. 고라니 똥이 풀숲 길가에 널렸다. 숲이 무성하게 산소를 내뿜는 지 숨이 깊어졌다. 진천 초평천의 ‘처음’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곳은 음성을 흘러 온 초평천이 모였다 흐르는 원남저수지 바로 아래였다. 두타산 줄기가 북으로 흐르다 잦아들어 초평천에게 물길을 내주었고 물길 따라 사람이 다니는 길도 있어서 ‘황골길’이라고 불렀다.
원남저수지 아래 마을을 지나 용동교에서 걸음을 멈췄다. 용동교 옆 세월의 더께 앉은 낮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물을 건너 사람들을 오가게 해주던 다리는 이제는 냇물처럼 숲처럼 자연에 묻혀 마음 주는 이의 눈길만 기다리고 있었다.
신평교 서단에서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뚝방길을 갔다. 그곳에서 초평천과 군자천이 만나는 풍경을 보았다. 물가의 너른 풀밭, 그 가운데로 흐르는 물줄기, 두 물줄기가 만들어놓은 논과 들, 지난여름 그곳에서 자랐던 곡식과 푸른 생명들의 땅이다. 순리처럼 초평천을 따라 흐르던 발길은 금한 마을에 도착했다.

농월정에서 본 초평호



금한교 건너 금한 마을로 들어섰다. 버드나무 고목 여러 그루가 만든 쉼터에서 한 아저씨를 만나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버드나무 쉼터는 원래 초평천 물길이었다. 굽이쳐 흐르던 물길을 바로잡고 쉼터를 만들었다. 윗마을은 ‘대암’, 아랫마을은 수문이라신다. 아저씨 사는 마을인 금한 마을까지 합쳐서 금곡리다. ‘대암’은 방 서너 칸 정도 되는 마당바위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줄기 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가지를 비틀며 자란 버드나무 고목들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섰다. 물길도 발길도 그렇게 흘러 초평호에 이르렀다.
초평호 초롱길을 걷다
초롱길의 시작 지점은 농다리다. 미호강에 놓인 천년 전 다리를 건넌다. 성황당 돌무지가 있는 살고개를 넘는다. 살고개에는 전설이 하나 내려온다. 초평호가 생기기 아주 오래 전 초평천이 흐르던 마을과 마을을 감싼 산세가 용의 형국이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에 있는 산을 깎아 길을 낸 뒤로 마을은 점점 쇠락해졌다. 풍수지리로 볼 때 산에 길을 낸 곳이 용의 허리에 해당되는 곳이었단다. 고개 이름이 용고개다. 용의 기운이 죽었다고 해서 살고개라고도 불러왔다.
초평호 물가에 난 데크길을 따라 하늘다리 쪽으로 걷는다. 바람에 호수 위에 물비늘이 인다. 햇볕을 흡수한 물이 옥빛을 내뿜는다. 바람이 일으킨 파문을 따라 낙엽이 물가로 몰린다. 하늘다리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물 건너 절벽을 바라보았다. 두타산의 세 신선이 머물렀다는 옛날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세 신선은 이곳 형국을 보고 훗날 이곳에 배가 뜰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그곳에 초평호가 생긴 것이다. 논선암 쪽으로 올라가는 절벽길이 꽤 가파르다. 숨을 고르며 초평호와 주변 산들이 만든 풍경을 굽어본다. 능선을 따라 걸으며 농암정에 도착했다. 가슴 통쾌한 전망이 펼쳐진다. 다시 살고개 방향으로 내려간다.
그동안 초롱길을 예닐곱 번 걸었다. 출렁다리 ‘초평호미르309’는 처음 보았다. 출렁다리에서 하늘다리로 가는 길도 정비되고, 황톳길 산책길도 생겨 다양한 코스로 초평호 둘레를 걸을 수 있다.
김유신 탄생지를 지나는 성암천
진천 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성암천의 물길을 따라 하루를 보냈다. 성암천은 만뢰산 남사면에서 시작된다. 그 최상류에 보탑사가 있다.
보탑사는 고려 초기에 절터에 근래 새로 지은 절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진천연곡리석비가 경내에 있다. 이 비석이 유명한 것은 비석에 아무 것도 새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백비(白碑)다. 백비로 만든 이유에 대한 실마리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떠도는 전설 하나 있을 법 한데, 그런 것도 없다. 이상한 건 백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에 마음 가는대로 무슨 글이 새겨진다. 백비는 나를 바라보고 바로 보게 하는 거울이 아닐까?

김유신탄생지



절 가운데 있는 거대한 목탑 형태의 ‘탑법당’, 와불, 아기자기한 경내 풍경 보다 마음에 남는 건 ‘절 앞의 느티나무’다. 4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 거대한 나무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사천왕상이 있는 절 문이 틀이 된다. 그 안에 느티나무 고목 한 그루가 부처님처럼 서있다.
성암천은 작은 도랑으로 흐르며 산골짜기 여기저기에서 내려오는 물과 하나 되어 제법 시냇물의 모습을 갖춘다.
성암천으로 흘러드는 여러 물줄기 가운데 보련마을에서 시작된 물줄기도 있다. 호박넝쿨 자라는 돌담 밭에 널어놓은 들깨가 말라간다. ‘돌담밭’ 앞에서 할아버지를 만나 마을 얘기를 들었다. 당신의 할아버지께서 마을에 학당을 짓고 글을 가르쳤다신다. 1934년부터 1942년까지 안중근 의사의 재종질 등 민족을 위해 헌신하던 선생님을 초빙하여 한글과, 우리의 역사, 민족 사상을 가르쳤다. 학당 자리에 성암초등학교 연곡분교가 들어섰고 한때는 백 여 명의 아이들이 꿀벌처럼 모여 공부하고 놀았다신다. 옛날에는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조, 콩 농사를 짓고 담배도 키우던 억척같은 세월을 견뎌냈다. 삼국시대에 만뢰산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만뢰산을 넘으면 백제 땅이었고 만뢰산 안쪽은 신라 땅이었다. 그 말씀 끝에 마을에 있는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보련마을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성암천과 하나 되어 연곡저수지로 흘러든다. 연곡저수지에 모였다 흐르는 계곡 옆에 김유신장군탄생지가 있다.
성암천, 미호강을 만나다
성암천이 지나는 진천읍 상계리 용소1교 부근에 성암천으로 흘러드는 두 물줄기가 있다. 그중 한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허준시료기념비’가 나온다. 허준 선생은 진천을 지나며 괴질을 앓는 백성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4년에 비를 세웠다.
또 다른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면 황금박쥐마을이다. 옛날 금광이 있던 동굴에서 황금박쥐를 발견했다. 그 이후로 황금박쥐마을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원래 이름은 금암리다. 금암리를 흐르는 물줄기의 최상류는 ‘안금성골계곡’이다. 이 물줄기가 곡식을 자라게 하고 사람도 쉬게 한다. 안금성골계곡 물길이 마을로 흐르는 주변 논에 익은 벼가 고개 숙여 황금들녘을 이루었다. 작은 웅덩이 위 나무 그늘 아래 만들어놓은 쉼터는 지난여름 땡볕을 피해 숨을 돌리던 마을 분들의 쉼터였을 것이다. 벼 벤 논은 겨울 채비를 하고, 마을 어르신은 회관 앞에 나와 들녘을 바라보신다. ‘금암회관’ 현판 옆에 ‘진천군황금박쥐감시단’이라는 현판도 보인다. 어르신께 여쭸더니 옛날 금광이었던 동굴에서 황금박쥐가 나왔다신다. 이야기 끝에 회관 앞 냇물 건너편 언덕을 가리키시며 저기에 그 동굴이 있다고 일러주셨다. 황금박쥐는 천연기념물이다.

左)보탑사 앞 40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느티나무의 가을 右)황금박쥐마을 계곡. 계곡 웅덩이에 쉼터를 만들었다



용소1교 북쪽에는 용소마을이 있다. ‘용소마을 유래비’가 마을 어귀에 있다. 진천읍 문봉리 용소마을. 유래비에 마을을 감싸고 있는 문안산은 산 모양이 사모(紗帽. 고려와 조선시대에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모자) 형상으로, 마을에서 문장가와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내용이 새겨졌다. 또 ‘마을에는 우물과 큰 연못이 있는데, 앉은뱅이가 물을 먹고 병을 고쳤다하여 약수우물이라 하며, 연못에서도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용소매기라 한다.’는 글귀도 새겨졌다.
용소1교 성암천은 그렇게 실핏줄 같은 산골짜기를 흘러온, 살아 숨 쉬는 옛 이야기가 모이는 곳이었다. 성암천은 그렇게 흘러 의병장 한봉수 항일의거비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머리를 조아린다. 일제강점기 충청도와 강원, 경상도 일대에서 항일 의병으로 일제와 전투를 벌인 인물이다. 청주, 진천, 괴산 등에서만 30여 차례 항일의병전투에 나서 일본군을 처단하고 무기를 빼앗았다. 민족과 나라를 구하고자 헌신한 그의 뜻을 기리는 항일의거비가 성암천 물가에 우뚝 서있다. 성암천은 그렇게 흘러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도암리에서 미호강으로 흘러들어 더 큰 물결로 흐른다.

EDITOR 편집팀
충청북도청
전화 : 043-220-2114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82(문화동)
함께하는 도민 일등경제 충북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