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주연야화의 것대산 봉수대 4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5-4. 주연야화의 것대산 봉수대
봉수대의 위치는 전술하였듯이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 ‘봉화산’이라 표시된 486.1m 산정부에서 서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같은 능선상의 443.4m 고지이다. (중략) 봉수대의 평면 형태는 능선 방향에 따라 동-서로 긴 장타원형으로 서쪽 면은 둥글고 동쪽 면은 뾰족한 평면을 이루어 계란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장축의 최대 길이는 24.3m이고, 단축의 최대너비는 16.3m이다. 봉수대 석축부분 내부의 지반은 서반부는 본래의 산정부로서 암반층 또는 부식암반층을 약간 정지한 후 생토 지면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으나, 동반부는 서반부의 산봉우리에 연결하여 흙을 쌓아 인위적인 평탄 대지를 조성하였다. 발굴 당시 서반부에는 1934년에 조성한 진주 강씨의 개인 묘가 자리하고 있었고, 동반부는 이곳 흙을 파다가 봉분을 쌓은 때문인지 서쪽에 비해 지면이 60~70㎝ 정도 낮아졌다. 전체적으로 서단부가 동단부보다 약 130㎝ 높고 북쪽이 남쪽보다 180㎝ 정도 높아 서고동저, 북고남저의 지세를 이루었다.

것대산 봉수 발굴조사 모습(1995)



봉수대 내부의 발굴조사는 강씨 묘가 있는 서반부를 제외하고 동반부 중앙에 十자형의 둑을 남기고 4구역의 트렌치를 설치하여 작업을 하였다. 발굴면적은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이나 북쪽 면의 방호벽은 4분의 3정도가 노출되었고, 동벽은 전면 노출되었으며, 남쪽 벽은 약 3분의 1정도가 노출되었다. 이 3벽의 내부는 대부분 노출되었다. 조사 결과 봉수대의 유구는 대체로 북쪽 면에 치우쳐 있으며, 지면도 남향으로 약간 경사진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남향의 지세를 이용한 것으로도 보이지만, 이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는 문의 소이산봉수가 있는 남쪽보다는 신호를 보내는 진천 소을산봉수 방향 즉 북쪽을 향하여 주요 시설을 배치한 것으로 해석된다.
봉수대 외곽에는 축대를 겸한 외벽을 높게 쌓고 내벽은 낮게 쌓은 방호벽을 둘렀다. 이것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지만, 봉수대에서 피운 불이 바람을 타고 밖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이 더욱 중요하였을 것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내·외벽이 노출된 북쪽 방호벽을 살펴보면, 외벽은 높이가 205~310㎝로 비교적 높게 쌓았으나 내벽은 125㎝ 정도이다. 외벽은 기저에서 약 180㎝에 이르는 부분 즉 안쪽의 지면에 일치하는 부분까지는 70~80° 각도로 허튼층 포개쌓기로 석축한 뒤, 위쪽의 방호벽은 거의 수직으로 올려 쌓았다. 내벽은 완전하게 잔존하는 부분이 없으나 거의 수직으로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석축의 두께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대략 상단부의 두께가 65㎝ 정도이다. 석축에 이용된 석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암계의 잡석으로 전혀 다듬지 않는 자연석이며,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축조한 수법이 전체적으로 정교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전문 석공이 아니라 봉수대에 근무하는 봉수군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축은 수차에 걸쳐 개축을 한 흔적이 보이는데 북벽의 외측 면에는 2단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높이 75㎝의 하단에서 안쪽으로 50㎝ 들여 석축을 쌓은 부분이 있어 후대에 개축한 것을 알 수 있고, 동단부는 발굴 전에 지상에 노출되었던 석축의 밖으로 5.3m 지점에서 석축의 기단 석렬이 노출되어 후에 안쪽으로 석축을 옮겨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개축한 부분은 본래의 석축에 비해 모두 안으로 들여쌓아 봉수대의 면적이 점차 좁아졌음을 보여준다.
봉홧불을 피우던 시설인 봉돈(烽墩)은 발굴 면적 내에 대략 2~3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모두 유실되어 정확한 위치나 규모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북벽과 동벽에 인접한 지점에서 숯가루가 발견되어 이곳에 봉돈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였는데 형태와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발굴로 노출된 돌무더기가 주로 북벽에 인접하여 있는 상태로 보아 북벽의 안쪽 가까이에 5개의 봉돈이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봉돈 위에 설치한 연통은 새우젓 단지로 흔히 사용되는 원통형의 독을 이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길쭉한 단지의 밑바닥을 뚫어 토관처럼 만든 것인데 내면에 검은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연통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봉수대 내에서 건물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기와 조각이 다량 출토되었다. 대부분 청해파 무늬가 있거나 민무늬의 조선시대 기와이고 일부 어골문이 있는 고려 내지는 조선 초기의 기와이다. 봉수대의 면적상 봉수대 안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 있기에는 비좁은 것이 사실이나, 『충청도읍지』의 「청주목지도」에 봉대(烽臺)를 기와집 형태로 표시하고 있어 망루와 같은 작은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봉수대의 남동쪽으로 약 50m 지점의 이정골로 통하는 계곡에 정성들여 쌓은 작은 우물이 있고 이 우물의 위쪽에 약간의 평지가 있어서 발굴을 하였는데, 매우 습한 지역으로 건물지는 없었고 검은 재가 지표면 아래로 180㎝ 깊이까지 두껍게 퇴적되어 있었다. 봉수대에서 나온 폐기물을 수백 년 동안 내다버린 장소로 추정되었다. 우물은 할석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내벽을 쌓은 것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면구조는 원형으로 우물 직경이 47㎝이고, 깊이는 뒤쪽이 120㎝, 앞쪽이 65㎝이다. 우물 앞에는 길이 590㎝, 폭 20㎝ 정도의 배수구를 만들었는데 우물에서 170㎝ 지점까지는 판석형의 잡석으로 복개하였고, 그 아래쪽은 노출시키고 약 1m 간격으로 납작한 돌을 가로로 걸쳐 놓았다. 우물의 내부는 시멘트로 발라 근래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도 양호하여 예전에 봉수군들이 사용하던 우물로 추측되었다.
것대산 봉수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강씨 묘는 발굴조사 후에 후손과 협의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적지가 되면서 묘를 계속 유지하기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1998년 11월 20일에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도에 청주시 일원에서 열린 제79회 전국체전을 앞두고 봉돈 1기를 복원한데 이어 2009년에 5기 전체를 복원하였다. 이로써 상당산성과 함께 청주의 중요한 문화유산 답사코스가 되었으며 체력단련을 위한 등산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청주시가 한눈에 조망되고 저녁의 일몰이 아름다워 사진 촬영의 명소가 되었으니 비록 봉홧불은 오르지 않더라도 청주를 지키던 마지막 보루였고, 가장 빠른 통신수단이었던 역사적인 유적으로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한편, 청주 것대산 봉수가 발굴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자 청원군에서는 문의 소이산 봉수에 관심을 갖게 되어 1999년에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조사결과 청주에서 문의로 들어가는 무너미고개의 좌측에 소재한 소이산 봉수는 현재 봉수시설은 모두 유실되었으나 그 터는 온전한 상태였다. 이곳도 발굴조사 후에 정비를 하고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것대산 봉수와 연계된 또 하나의 관방유적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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