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근대와의 조우
꽃심이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나는 고을에서
'옛 전주읍성 둘레'

꽃이라 하면 아름답지만 쉬이 꺾이고 시들어 버리는 여리디여린 온실 속 화초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이 꽃을 달리 보았다. 온갖 것에 시달리면서도 꿋꿋이 꽃을 피워내는 힘이 아름다움의 본질이라고, 여기에서 ‘꽃심’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전라도를 ‘가슴에 꽃심이 있으니, 피고, 지고, 다시 피어’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땅이라고 했다. 전라도의 수부 도시 전주가 숱한 시련 속에서도 천년고도의 품격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꽃들을 피워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꽃심 때문이니, 꽃심이 이끄는 대로 옛 전주읍성 둘레를 거닐었다.

한옥마을



조선의 태 자리를 둘러싼 한옥마을
전주로 향하는 여행자가 가장 즐겨 찾는 목적지는 경기전을 둘러싸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사진 01) 전주 경기전 정전(보물, 사진 02)은 태조의 진전(眞殿)이다. 진전이란 왕의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을 가리킨다. 1410년(태종 10년)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서 의미를 새겨 전주에 이 진전이 조성됐다. 그런데 전주한옥마을은 경주의 양동마을이나 안동의 하회마을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한옥마을이지만 좀 ‘모던’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느꼈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전주한옥마을의 한옥은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근대 한옥’이 대다수다. 그러니 더 갸웃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조선의 태 자리를 근대 한옥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새가 말이다.
조선조 전주 경기전 정전(사진 02, 보물) 가운데 두고 사방을 크게 둘러 3.2km에 달하는 전주읍성(전주부성지,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이 있었다. 일제는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수탈한 양곡을 일본으로 원활히 수송하기 위해 전주와 군산 사이에 일직선의 도로를 냈는데, 그 과정에서 전주읍성의 성곽 대부분이 헐리고 남쪽 대문인 전주 풍남문(보물)만 오늘날 섬처럼 남게 됐다. 무너진 성벽 주변 특히 풍남문을 기준으로 그 서쪽에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와 상권을 형성했고, 식민 지배가 가속화되며 점점 세를 넓혀갔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전주 사람들이 그 반대편 조선의 태 자리인 경기전 주변으로 한옥을 지어 살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전주한옥마을이 형성된 배경이다.

左) 경기전 앞 右) 학인당



근대 한옥의 멋
그렇다면 근대 한옥은 전통 한옥과 어떻게 다를까? 목조의 기둥과 보로 집체의 균형을 잡아 볏짚과 흙 등 자연 재료로 마감하고 기와로 지붕을 인 구조와 형태미는 전통 한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근대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아 전체적인 규모가 축소되고, 그에 따라 제한된 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없어지는 등 공간 배치에 다수의 변화가 발생했다. 또한 입식 부엌과 화장실, 유리 창문 등 근대의 생활 양식과 기술, 그에 적합한 재료도 십분 활용됐다.
현재 고택 스테이로 운영되고 있는 수원 백씨 인재공 백낙중 종가의 고택인 학인당(사진 03, 04, 전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유산) 솟을대문을 넘으면 한옥마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빼어난 근대 한옥을 마주하게 된다. 백낙중 종가는 구한말 전주의 만석꾼 집안이다. 중건에 한창이던 경복궁에 화재가 나 왕실이 어려움을 겪을 때 큰돈을 쾌척했고, 이에 고종으로부터 공헌을 치하받아 궁중 건축 양식을 접목한 지금의 고택을 짓게 됐다. 우물마루로 된 복도를 따라 방과 방이 연결되고, 3중으로 된 방문 등이 궁궐에만 적용된 양식이라고 했다.
백낙중 종가는 소리꾼들을 위한 공연장을 염두에 두고 이 집을 지었다. 전주는 팔도의 으뜸가는 소리꾼들이 모여드는 판소리의 고장이다. 혼란스러운 시절일수록 문화적 뿌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2층 높이에 가깝도록 천장을 높여 소리가 잘 퍼져나가고, 대청마루 좌우로는 문을 들어 올려 공연 시 실내 공간을 확장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당시로서는 서민의 눈이 휘둥그레질 전기와 수도 시설까지 완비했다. 학인당 소개자료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후원을 담당한 학인당에서 임방울 명창 등 당대 내로라 하는 분들이 공연을 이어가는가 하면 광복 후에는 백범 김구 선생 등 정부 요인들이 머무는 영빈관으로 이용되기도 했단다.

삼원한약방



1908년 완성된 학인당은 보통의 사람들이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대궐 같은 집이었지만 동시에 본보기가 되는 집이었을 것이다. 학인당 담장 너머로 193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삼원한약방’(사진 05, 06) 그리고 본래 한약방과 한 울타리에 있다가 1960년에 분리되어 인근 지역 군수를 지낸 인물이 살아 ‘군수집’으로 불린 댁에서도 근대 한옥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전동성당



허물어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읍성의 기운
전주한옥마을에서 단정한 근대 한옥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경기전 맞은편에 위치한 전주 전동성당(사진 07, 08, 사적)이다. 전주는 개항지도 아니었고, 유교 문화와 전통이 탄탄히 뿌리내린 향촌이라 천주교 유입이 더디게 진행됐다. 그러나 전라감영이 위치해 있어 천주교 박해 때 다수의 신자들이 전라감영으로 이송돼 순교하게 된다. 1885년 조선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던 보두네(Baudounet) 신부는 읍성이 헐리던 때에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성돌을 가져다가 전동성당의 기틀을 마련했다. 바로 순교터에.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Poisnel) 신부가 성당 건축을 담당했다. 전동성당은 그 자체로 고풍스러운 건축미를 자랑하지만 옛 읍성의 잔해를 주춧돌 삼은 격변기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左) 중국인 포목상점 右) 박다옥



전동성당 건립에는 중국인 인부들이 대거 동원됐다. 특히 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이 벽돌을 쌓는 일에 중국인 벽돌공들의 역할이 컸다. 전라감영 근처에 1920년대 중국인 벽돌공들이 상하이의 비단 상점을 본떠 지은 전주 다가동 구 중국인 포목상점(사진 09, 국가등록문화유산)은 당시 화교의 생활상을 그려보게 하는 건축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록됐다. 포목상점에서 골목 따라 2분 거리에 마찬가지로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록된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사진 10, 국가등록문화유산)은 근대기 이 일대가 일본인 상권이었던 역사를 증언한다. 우동집으로 문을 연 박다옥은 타일과 인조석으로 마감한 3층짜리 건물 전체가 음식점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한옥마을과 이 상권이 얼마나 다른 풍경이었을지 그려보게 한다.
전주한옥마을 가장자리 야트막한 언덕 오목대이목대(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에 오르면 팔작지붕이 서로 어깨동무하듯 처마 자락을 이어가는 한옥마을과 그 사이에 우뚝 솟은 전동성당, 그리고 그 너머 전주 원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몰랐을 때는 그저 이색적인 풍경이지만 알고 보면 이 안에서 전주의 한 세기를 읽게 된다. 이에 더하 꽃심으로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나는 고을 전주는 앞으로 또 어떤 꽃을 피워낼지 기대케 된다.

EDITOR 편집팀
국가유산청
전화 : 1600-0064 (고객지원센터)
주소 : 대전광역시 서구 청사로 189 정부대전청사 1동 8-11층, 2동 14층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다양하고 유익한 문화재 관련정보
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 더보기
해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