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조선의 장수왕 영조와 무성리 태실 1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6-1. 조선의 장수왕 영조와 무성리 태실
청주에서 상당산성 입구를 지나 미원을 향하여 내리막길을 달리다 보면 무성교라는 작은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에서 감천을 따라 북쪽으로 1.2㎞ 올라가면 무성1리 태봉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의 뒷산 능선부에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의 태를 묻은 태실이 있다. 소재지는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 산6-1이고, 충청북도 기념물 제69호이다. 대학시절인 1978년 여름 방학에 처음 이곳을 조사하였을 때는 태실은 이미 없어져 행방을 알 수 없었고, 태실비(胎室碑)가 마을회관(지금은 복지회관) 앞의 좁은 길가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45년이 지난 오늘까지 원위치를 찾아 완전하게 복원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흩어졌던 태실 석재들을 대부분 찾아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영조는 청주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가 태어나자 장수를 기원하여 1등 태봉인 청주 무성리 태봉에 태를 묻었다. 그리고 영조를 왕위에서 쫓아내려는 이인좌의 난이 청주에서 일어났으니 악연도 분명히 있다.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서 1694년(숙종 20) 9월 13일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해주최씨로 본래 무수리로 궁에 들어온 미천한 신분의 궁녀였다. 숙빈 최씨는 한낱 궁중 나인이 비빈의 지위에 올랐다는 입지전적인 일화와 함께 아들 연잉군 금(昑)이 온갖 고난을 딛고 왕위에 올라 조선의 최장수 임금으로 재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당대에 막강한 세력이었던 서인의 후원으로 국모가 된 인현왕후 민씨나 역관으로서 부를 축적한 장형의 딸로서 남인의 지지를 받아 중전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장희빈에 비해 숙빈 최씨에게는 궐 안팎으로 이렇다 할 배경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최씨는 자신의 소박한 품성과 미덕만으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것은 영조로부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까지 자신의 혈통으로 왕위가 계승되는 아주 특별한 영화로 길이 남았다. 영조는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장수한 왕으로 83세까지 살았으며 재위 기간 역시 52년으로 가장 길다. 청주 무성리 태봉이 과연 장수하는 길지였다고 해석하더라도 굳이 시비를 따질 사람은 없어 보인다.

영조 어진



영조는 즉위 과정은 물론 즉위 후에도 왕위 자체를 부정당하는 당쟁의 폐해를 몸소 체험하였으므로 이러한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추진하여 당쟁의 조정에 힘썼고, 균역법을 통해 국정 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한편 사회변화에 대응해 실학의 진작과 문화 창달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사후 묘호는 영종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로 고쳐 올렸다. 그의 능은 구리시에 있는 원릉이다.
영조의 태는 생후 13일 후인 9월 26일에 관상감에서 올린 글에 의하면 처음부터 1등 태봉인 충청도 청주목 산내일동면 무쌍리의 묘좌유향(卯坐酉向)에 묻는 것으로 낙점되어 있었다. 그리고 장태(藏胎) 일시는 다음 해 정월 28일 진시(辰時) 즉 아침 7시로 정해졌다. 그리고 11월 10일에는 태를 묻을 때 들어가는 각종 물건을 충청도와 각 해당 관청에서 준비하도록 명하였고, 태를 실은 가마가 지나갈 도로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관찰사가 책임지고 수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처음 계획과는 달리 영조의 태는 생후 1년이나 지난 1695년 9월 24일에 궁을 떠나 27일에 청주에 도착하였으며 28일 진시에 안태(安胎)되었다. 이때의 안태는 돌로 만든 태함에 봉송해온 태항아리와 태의 주인공 생년월일시와 태를 묻는 날을 기록한 태지석(胎誌石)을 넣어 땅속에 묻는 것이었다.
1724년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세제였던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태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즉시 석조물로 치장한 태실을 조성하게 되는데 영조 역시 즉위 후에 왕실의 예법에 따라 태실 공사를 서둘렀다. 그러나 영조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으니 서둘지 말라고 하여 착공을 늦추었는데, 하필 1728년(영조 4)에 영조의 태가 묻힌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이를 수습하느라 더욱 늦어졌다. 그리고 난이 평정되고 나자 다음 해에 태실을 조성하였다. 때가 때인 만큼 왕의 위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마침 영조의 직전 왕이었던 경종은 즉위 4년에 사망하여 자신의 태실을 조성하지 못하였으므로 영조가 즉위한 2년 후에 충주 소태면에 경종 태실을 조성한 경험이 있다. <2부에서 계속>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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