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조선의 장수왕 영조와 무성리 태실 2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6-2. 조선의 장수왕 영조와 무성리 태실
영조 태실의 조성 경위를 상세히 적은 기록이 남아 있다. 제목이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英祖胎室石欄干造排儀軌)』라 하여 다소 길고 어렵지만, 영조 태실의 돌난간을 만들어 설치한 기록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의궤란 조선 시대에 왕실이나 국가 행사가 끝난 후에 논의, 준비 과정, 의식절차, 진행, 행사, 논공행상 등에 관하여 기록한 책을 말한다. 이 의궤는 필사본 문서로서 본래 무성리 이장이었던 이상린씨가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 청원군에 기증하여 문의문화재단지에 전시되다가 청주 청원 통합 이후 청주고인쇄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되었다가, 조선왕조의 여러 의궤 1,373건과 함께 묶어 2016년 5월 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01-11호 ‘조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로 승격 지정하였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구리 동구릉)



왕위에 오른 이후 태실을 석조물로 치장하는 것을 가봉(加封)이라 한다. 왕자나 공주 등 왕실의 아기가 태어나 처음 조성된 태실을 국왕의 권위에 어울리게 석물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미는 가봉 태실로 조성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왕위에 오르면 곧바로 왕의 태실을 가봉하는 것이 원칙이다. 명종은 원칙에 따라 즉위하자마자 그해에 충남 서산에 있는 태실을 가봉하였다. 그러나 즉위한 지 몇 년이 지난 후에 태실을 가봉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태실 가봉은 원래의 태실에 석조물로 화려하게 치장하는 큰 공사였으므로 300명 이상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고, 각종 물자를 조달해야 하는 등 만만치 않은 공역이었기 때문이다.
1801년(순조 1) 10월 강원도 영월에 있던 정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는 강원도에서 1,700명, 충청도에서 2,508명의 부역군과 돌을 나르는 예석군(曳石軍)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줄이기 위해 농번기나 흉년을 피하다 보면 자연스레 즉위하고 몇 년이 지난 이후에 태실을 가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태실 가봉은 주로 천문과 지리를 담당하는 관상감과 토목건축을 담당하는 선공감(繕工監)에서 맡았으나, 인력과 필요한 물품들은 대부분 태봉이 위치한 지역과 인근 지역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태실 가봉은 국왕의 아기 태실 주변에 돌기둥을 세우고 돌난간 등을 새롭게 설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태실석난간조배의궤』에는 가봉 태실의 조성에 관한 신하들의 건의 과정을 시작으로 태실 가봉 일정, 인력과 물품의 분담, 주요 석물의 연마 과정에 관한 보고서, 고유제와 후토제 등의 제사 의식의 절차와 축문, 각종 석물의 길이와 너비, 난간석 조작도, 난간석 배설도, 진설도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태실을 가봉하는 데도 복잡한 절차와 부담이 있지만, 조성 이후에도 이것이 소재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부담이 가중되는 존재였다. 인근에서 8명 또는 16명의 수호군을 뽑아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훼손이나 변고가 있게 되면 지역이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충주에 있는 경종 태실이 훼손된 사건이 있었다. 1831년(순조 31) 11월 김군첨 등이 작당하여 이 태실을 파헤치고 석물을 흩어놓고는 태봉지기에게 화를 덮어씌우려고 하였는데, 충청도 관찰사 홍희근이 사건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 조인영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게 한 뒤 주동자 김군첨을 사형에 처하고, 그 밖의 관련자 11인은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태봉지기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나 불만이 있었던지 그를 벌주기 위해 태실을 훼손하였다가 오히려 자신이 사형을 당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실례에서 보듯이 인근의 주민들은 태실에 각별한 신경을 써서 변고가 없도록 관리해야 했다.

영조태실 모습



그러다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조선왕조가 망하자 태실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황폐해지고 도굴되는 일이 잦아졌다. 태항아리는 당대 최고 걸작의 도자기인 데다 제작 시기가 정확한 것이어서 그 가치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태실의 관리와 도굴 방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1927년 조선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이왕직(李王職)에게 전국에 흩어져 있는 태실에 대해 일제히 현황조사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일괄적으로 태실 속에 있는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의 유물을 꺼내어 서울로 가져왔다가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옮겼다. 이때의 기록과 유리원판 사진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지금까지 잘 보관되어 있긴 하지만, 전국의 태실이 일제히 파괴된 명백한 도굴이 아닐 수 없다.
1928년 9월 10일 매일신문을 보면, 창덕궁의 예식과(禮式課) 전사(典祀, 의전과 제사를 담당하는 직원) 두 사람이 존귀하옵던 어른들의 태(胎)가 무슨 지경에 갈지 모른다고 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명산에 묻힌 태실 29기를 파서 경성으로 모셔왔다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1929년 3월 1일 동아일보에는, 태실의 파괴 또는 손실 방지를 위하여 태항아리 3개를 경성으로 옮겨와 현재 종로구 내수동의 서울지방경찰청 부근에 봉산실을 마련하고 임시 보관한 후 추위가 물러가면 서삼릉으로 이전한다는 기사도 보인다. 유리원판 사진에는 각 태항아리의 주인과 지석의 봉안 시기를 적은 묵서가 선명하게 보이고, 아울러 이왕직에서 태실을 이장하면서 기록한 문서에는 태실의 이장 시기를 구체적으로 적어 놓았다. 이때 청주에 있는 영조 태실을 비롯한 인근의 태실들이 일제히 파헤쳐져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 유물만 반출해 가고 석함과 비석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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