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6-3. 조선의 장수왕 영조와 무성리 태실 조선왕조의 태실이 있었던 자리는 모두가 명당이었기 때문에 태실이 없어지자 그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지역의 부자들이었다. 1928년 영조 태실이 파헤쳐진 후 그 터는 부강의 만석꾼으로 유명한 김학현이 매입하여 남아있던 석조물들을 모두 산 아래로 굴려버리고 조부의 묘소를 썼다. 그럼 그 후손들이 복을 받고 잘 살았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집안은 이후 패가망신하고 거의 멸문되었다고 전한다.
김학현은 본래 부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부를 축적한 사람으로 왕의 태를 묻었던 태봉이야말로 명당자리로 믿고 땅을 매입하여 조부의 묘를 이장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태봉 마을 주민들은 왕의 태실 자리에 개인 묘소가 들어오는 것이 못마땅하여 처음에는 부정을 탈 것이라며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묘를 쓰려 하자 주민들은 상여가 들어오는 날 힘을 합쳐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로 하였다. 이를 미리 눈치 챈 김학현은 건장한 장정 50여 명을 동원하여 마을로 밀고 들어와 묘를 조성한 후 웅장한 재실을 지었으니 현존하는 성모재(誠慕齋)가 그것이다. 영조 태실이 도굴된 것은 1928년이지만 석재들을 산 아래로 밀어낸 것은 바로 이들의 소행이었다. 왕가의 태실에 묘를 쓰면 부정을 타서 대가 끊어질 것이라는 역술인의 조언이 있었지만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후일담에 의하면 김학현의 아들은 6.25때 보도연맹에 몰려 죽임을 당했고, 손자는 아들 하나 없이 딸만 여덟을 두어 결국 대가 끊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많던 재산도 모두 잃은 후에 그의 손자가 남들 모르게 태실 터에 있던 고조부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해 갔다고 한다.
영조 태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처럼 훼손되었으나 어려운 시기를 지내며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처음 이곳을 답사하였을 때도 태실비만 마을 앞에 덩그러니 있었고 태실의 석조물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81년 늦여름에 청원군 문화공보실에서 현지를 조사하여 산 아래로 굴러떨어진 일부 석재들을 확인하였는데, 이때 마을 이장인 이상린씨가 보관하고 있던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가 발견되어 이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3월에 복원공사가 착수되었다.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
다만, 태실의 원위치에는 아직 김학현 조부의 묘소가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원위치에서 150m 정도 아래의 산등성이에 자리를 정하고 복원공사를 하던 중에 주변에서 총 21점의 태실 부재가 발견되었다. 이에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설계를 변경하여 발견된 부재들을 모두 복원에 사용하고 부족한 것은 다시 제작하여 조립하기로 하였다. 공사는 당연히 지연되어 예정보다 늦은 11월에 완료되었는데, 어쨌든 1928년에 훼손된 지 54년 만에 영조 태실이 원위치도 아니고 옥개석이 결실되어 완전하지 못하지만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1984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주변에서 석재들이 추가로 발견되어 1987년 12월에 원래의 부재들로 교체하였는데, 옥개석은 아직 찾지 못하여 언젠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의 모습은 이때 공사한 것이다.
아기씨태실비, 영조태실비(주상전하태실)
모든 태실에는 처음 아기의 태를 봉안하고 세운 아기씨 태실비가 있고, 왕위에 오른 뒤에 태실을 가봉하고 세운 가봉 태실비가 있다. 복원 당시 영조 태실에는 가봉 후에 세운 태실비만 있었다. 전면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옹정칠년십월십사일건(雍正七年十月十四日建)’이라고 쓰여 있다. 즉 당시 주상전하의 태실을 1729년(영조 5) 10월 14일에 가봉하고 세웠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기씨 태실은 비를 세우기 위한 받침돌만 남아 있고 정작 비석은 행방을 알 수 없어 근처 어딘가에 매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1년 8월 충북도청에 대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정상근(鄭祥瑾)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신이 오래된 비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비문을 보니 아무래도 영조의 아기씨 태실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비의 전면에는 ‘강희 33년(1694) 9월 13일 인시(寅時)에 태어난 왕자 아기씨의 태실(康熙三十三年九月十三日寅時生阿只氏胎室)’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강희 34년(1695) 1월 28일 세움(康熙三十四年一月二十八日立)’이라 새겨져 있어 영조의 태어난 날과 일치한다. 다만, 태실비를 세운 날짜는 실제 안태일(安胎日)인 9월 28일과 8개월의 차이가 있다. 이는 이런저런 이유로 안태가 1년이나 늦어진 때문이라 하겠으며, 본래 안태일로 잡았던 날은 1월 28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 아기씨 태실비는 매우 중요한 유물인데 뒤늦게나마 발견되어 다행이었다. 1991년 8월 22일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아기씨 태실비는 일제강점기에 태실이 도굴된 후 일본인이 일본으로 반출하려다가 버려둔 것이 골동품상에 넘어갔다가 이를 매입한 정상근씨가 영조 아기씨 태실비임을 알고 충청북도에 제보하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충청북도에서는 이것을 80만 원에 매입하여 낭성면사무소에 임시 보관하다가 다음 해 6월에 태실 앞에 있는 대석 위에 세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비석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태실의 형태는 중앙에 2단으로 된 정사각형의 댓돌 위에 구형(球形)의 중동석(中童石) 즉 몸돌과 팔각의 옥개석을 얹어 마무리하였는데, 현재 옥개석은 유실되어 찾지 못하고 있다. 태실 주위에는 팔각의 전석을 깔고, 각 모서리에는 우주석을, 8면의 중앙에는 동자석을 세운 뒤 육각의 장대석을 가로 얹은 호석난간(護石欄干)을 둘러 가봉하였다. 태실 앞에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용트림을 조각한 이수를 얹은 태실비가 남아 있고, 뒤에는 대구에서 찾아온 아기씨 태실비가 세워져 있다.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