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쌀과 계절별 주재료, 온도와 시간이 만드는 자연의 예술작품이다. 따라서 시간이 무르익으면, 술도 익는다. 가을이 한껏 무르익은 지난 11월, 북촌한옥마을의 한 공방에서도 가을을 대표하는 전통주 국화주 익는 냄새가 퍼졌다. 작품을 빚듯 정성을 들여 술 예술로 거듭난 과정을 소개한다.
송정아, 양승민, 최윤정 참가자(사진 왼쪽부터)
전통 한옥에서 만난 술의 민족 우리는 술의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기원전부터 음주와 가무를 즐겼고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같은 제천행사에서 집단으로 춤과 노래를 부르면서 주술적 의미를 나눴다.”(한식진흥원, <전통주 한식과 만나다(2018)>) 그리고 우리 술은 “삼국,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면서 제조법, 품질 등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농촌진흥청, <풀어쓴 고문헌 전통주 제조법(2011)>
각 가정에서도 술 문화를 꽃피웠다. 우리 조상들은 계절마다 나는 재료를 활용해 봄에는 송순주(松筍酒), 가을에는 국화주(菊花酒)를 빚어 마셨고, 단옷날에는 창포주(菖蒲酒)를 나눠 마시며 건강을 빌었다. 농번기에는 일꾼들에게 먹이기 위해 농주(農酒)를 빚었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제조 방법에 따라 빚는 술을 전통주(傳統酒)라 한다. 지방마다 특색 있게 빚는 민속주(民俗酒)도 있다.
현대에 들어서도 사람들은 고문헌에서 전통주의 흔적을 찾아 복원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가을 세 명의 참가자도 우리 전통 한옥에서 전통 술을 만들며 그 뜻을 이었다. 한옥 돌담 사이를 시간 여행 하듯 지나 가장 먼저 공방을 찾은 사람은 한식해설사 송정아 씨다.
“저는 전통음식을 비롯해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음식을 외국인에게 소개하고 있어요. 타계한 김택상 명인과 소주 페어링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한 적도 있고요. 오늘은 우리 전통주에 관한 지식과 아이디어를 얻고 싶어서 프로그램 참여를 신청했습니다.”
이어 최윤정 씨가 공방에 들어서자 두 사람이 서로 알은체한다. 알고 보니 인도네시아어 관광통역안내사인 윤정 씨는 정아 씨와 과거 한식 프로그램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한식’이라는 공동의 관심사를 둔 양승민 씨도 금방 이들과 가까워진다. 같은 관심사가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 문화라는 사실은 자연스레 사람들을 하나로 만든다.
01, 02. 좋은 술은 좋은 쌀에서 나오고, 고두밥을 알맞게 지어 밥알이 부서져선 안된다.
정성에 정성을 더해 만들어지는 전통주 오늘 만들어 볼 전통주는 가을에 어울리는 국화주다. 국화주는 맛과 향도 뛰어나지만, 몸을 가볍게 하고 뼈와 근골은 튼튼히 해 주며 해독에 효능이 있어 건강에도 좋다.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가을철 대표 술이기도 하다.
국화주를 빚는 데 또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쌀’이다. 권승미 강사는 쌀을 씻고 밥을 짓는 과정에도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좋은 쌀에서 좋은 술이 나옵니다. 그래서 갓 도정한 쌀로 밥을 짓는 게 가장 좋지요. 쌀은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씻어야 하는데, 문헌에는 ‘백세(百洗)’ 즉 백 번 씻으라고 나옵니다. 잘 씻은 쌀은 한나절 이상 불려야 하고요. 찜기에 불을 올리고 김이 올라오면 쌀을 넣어 고두밥을 짓는데, 중간에 물을 부어 쌀이 골고루 익게 해야 합니다. 다 된 밥은 넓게 펴서 식힙니다. 이때 쌀알이 부서지지 않게 주의해야 해요. 쌀알이 뭉개지거나 부서지면 술이 탁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03. 좋은 술은 좋은 쌀에서 나오고, 고두밥을 알맞게 지어 밥알이 부서져선 안된다.
권승미 강사의 말에 쌀을 다루는 손길이 더욱더 조심스러워진다. 고두밥에 누룩과 물을 섞어 술밑을 만들 때도 쌀알이 눌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세 사람이 고두밥과 누룩, 물이 잘 섞이도록 섞자 이제 됐다는 듯 ‘뽀록’ 하고 기포가 올라온다. 강사가 “발효가 잘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설명하자 다들 신기한 듯 웃음을 터트린다.
소독한 항아리에 마른 감국(甘菊)을 먼저 깔고, 술밑을 담으면 첫 관문을 넘은 셈이다. 이제 각자 집에서 햇볕이 들지 않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두고 발효시켜야 한다. 하루 이틀 지나 1차 발효되면 독특한 향을 내며 기포가 올라오는데, 그러면 차가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이후 2차 발효가 되면서 ‘술맛’을 내면, 체나 주머니로 걸러 맑은 술이나 탁주로 마시면 된다. 시간을 두고 관찰하며 자신에게 딱 맞게 맛이 들 때 걸러도 된다.
04.다 된 밥을 넓게 펴 식히는 모습 05.권승미 강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는 참가들 06.전통주 재료
국화주 익듯 전통문화 관심도 깊게 익는 시간 체험을 마치고 정아 씨가 한식해설사답게 “국화주와 어울리는 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묻자 권승미 강사가 “향이 강한 술이니 담백한 음식과 먹는 것이 좋다. 간이 센 음식은 술맛을 해칠 수 있다”라고 답한다. 체험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서도 세 사람은 “여름에는 어떤 재료를 활용해 술을 빚는지”, “국화주에 어떤 향을 가미하면 더 맛이 좋은지”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쏟아낸다. 권승미 강사는 “한식에 관해 관심과 경험의 크기만큼 궁금한 것도 많은 모양”이라며 유쾌하게 질문을 받아준다.
담금주는 몇 번 빚어보았지만, 전통주 만들기는 처음이라는 윤정 씨는 “고즈넉한 한옥에서 전통주를 만들어서 더 특별했어요.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기에 우리 조상들은 단순히 ‘술을 만든다’라고 표현하기보다 ‘빚는다’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 마음마저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권승미 강사는 “고문헌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주변 재료를 활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술 만들기에 도전했고, 목욕재계 후 정성을 다해 술을 빚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술의 민족답게 여러분도 전통주 만들기에 계속 도전해 보면 좋겠습니다”라고 조언한다. 이에 승민 씨는 “전통주가 대중화할 수 있도록 쉽게 또 열정적으로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언해 주신 대로 집에서 계속 도전하며 저만의 전통주를 만들어 볼 계획이에요. 실력이 쌓이면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도 하고 싶습니다”라며 각오를 내비친다.
07, 08.참가자들은 다양한 빚어진 전통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었다.
체험이 끝나고 며칠 뒤 정아 씨는 “국화주가 잘 익어 가족과 함께 즐겼습니다”라며 소식을 전해왔다. 덧붙여 “김장 문화에 이어 한국의 장 담그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또 다른 발효식품인 전통주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좋겠어요. 또 그동안 <국가유산사랑>을 통해 ‘읽는 즐거움’만 누리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앞으로 ‘참여하는 즐거움’도 자주 느껴보려 합니다”라며 바람을 전했다.
과거 술이 맛있게 익은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술은 사람들에게 건강과 즐거움뿐만 아니라 집안의 번성까지 가져다주었다. 오늘 체험으로 맛있게 익은 술이 세 사람에게도 기쁨 그 이상의 만족을 가져다주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