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조선의 장수왕 영조와 무성리 태실 4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6-4. 조선의 장수왕 영조와 무성리 태실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전국에서 도굴된 조선왕조 왕자 공주 옹주 등의 태실 54기가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가 1996년에 발굴한 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는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비록 제자리를 떠나 있지만 완전한 상태로 잘 있어서 다행이다. 태항아리는 외항아리와 내항아리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뚜껑을 갖춘 최상급의 백자 항아리이다.

영조의 태를 보관한 외항아리, 영조의 태를 보관한 내항아리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외항아리는 높이 22.7㎝, 입지름 18.7㎝, 밑지름 16.5㎝ 크기의 백자 항아리로 키가 작고 입과 밑바닥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입술은 외반되어 말려 있으며 어깨 부분이 넓게 벌어졌고 밑쪽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진다. 어깨에는 4개의 C자형 고리가 달려 있는데 고리 단면은 방형으로 각이 져 있다. 바닥은 굽깎기를 한 안굽으로 되어 있고 항아리 전면에는 유약이 얇게 발라져 있으며 빙열이 있다. 외면에는 봉합천과 주칠끈 자국이 보이며, 내면에는 정면하다가 태토가 일어난 부분이 보인다. 태토는 정선된 백토를 사용하였고 번조는 모래받침으로 하였으며 성형은 물레 성형으로 하였다. 뚜껑은 높이 10.7㎝, 지름 21.6㎝로 넓은 대접을 엎어 놓은 형태로서 출토될 때 반파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뚜껑 윗면에는 보주형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손잡이 목에는 방형의 구멍이 4개 뚫려 있다. 외면에는 봉합천과 주칠끈 자국이 남아 있으며, 내면에는 번조를 하기 위한 얇은 둥근 테 받침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태토는 정선된 백토를 사용하였고 유약은 담청색 투명유를 얇게 발랐으며 빙열이 보인다. 기벽은 얇은 편이다.
태를 직접 담고 있었던 내항아리는 높이 14㎝, 입지름 8.7㎝, 밑지름 8.5㎝의 작은 항아리로 담청색 빛이 감도는 백자이다. 입술은 외반되어 말려 있으며, 어깨는 팽배해졌다가 밑으로 가면서 좁아진다. 어깨 위에는 C자형 고리가 달려 있는데 단면이 원형이다. 밑바닥은 안굽이고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태토는 정선된 백토를 사용하였고 유약은 전체적으로 고르게 발라졌으며 바닥과 밑부분에 빙열이 보인다. 성형은 물레로 하였는데 내면에 물레로 성형한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 뚜껑은 높이 5.5㎝, 지름 10.6㎝의 작은 접시를 엎어놓은 형태이다. 윗면에는 단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손잡이 목에는 원형의 구멍이 4개 뚫려 있다. 내면에는 물레를 돌린 자국과 번조를 하기 위한 얇은 테 받침이 보인다. 태토는 정선되고 유약이 얇게 발라져 있으며, 빙열이 없다.
태지석은 재질이 오석(烏石)으로 크기는 가로 25.9㎝, 세로 25.9㎝, 두께 4.8㎝이다.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에는 주칠을 하였던 흔적이 있으며, 전면에는 음각으로 ‘강희 33년(1694) 9월 13일 인시(寅時) 탄생 왕자 아지씨(康熙三十三年九月十三日寅時 誕生王子阿只氏)’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강희 34년(1695) 정월 28일 진시(辰時) 장(康熙三十四年正月二十八日辰時藏)’이라 새겨져 있다. 역시 영조의 태어난 날은 일치하지만, 장태한 날짜는 아지씨 태실비와 같이 원래 정해진 날짜를 새기고 있어 9개월이나 미루다가 실제 태를 봉안한 날과 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태항아리에서 발견된 개원통보(開元通寶) 동전 1개도 전해진다. 태항아리에 동전 1개를 넣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다. 개원통보는 중국 당나라 때의 화폐로 전면에 걸쳐 녹색과 검은색의 녹이 슬어 있고 부식이 심한 편이다.
1928년에 영조 태실에서 도굴된 내, 외 2중의 태항아리와 함께 태지석, 개원통보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밖에 또 하나의 유물이 1998년에 남이면 외천리의 어느 집 정원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영조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을 봉안하였던 돌함으로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여 가봉하기 전까지 사용되었던 원래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외천리에 가 있을까? 추적해 보니 그 연유는 명확하였다. 이것이 발견된 집이 영조 태실이 있던 태봉 일대를 매입하여 자신의 조부 묘소를 조성하였던 김학현의 친형제 집이었다. 조부 묘를 조성하느라 파헤쳐진 태실 부재들 중에서 모양이 좋은 이것을 자신의 정원 장식을 위해 가져갔을 것이다. 이 돌함은 원통형의 함과 위가 뾰족한 반구형의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 90㎝, 지름 60㎝이다. 2000년의 홍수 때 발견된 태실 난간 기둥돌 2개와 함께 현재 문의문화재단지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2017년 여름의 폭우로 태봉산 뒤쪽 계곡이 휩쓸렸는데 여기서 많은 태실 부재들이 노출되었다. 소식을 듣고 바로 현지를 답사한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석재의 양도 많았지만 모두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이었고, 아울러 태실의 원위치에 올라보니 그 자리에 있었던 개인 묘소 즉 김학현 조부의 묘소는 이미 이장하여 공터로 남아 있었다. 순간 석재들을 모두 수습하여 원위치에 태실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를 마치고 청주시청과 충북도청 담당 직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로써 흩어진 석재들을 모아 한 군데에 파묻어 보관하고 토지 매입을 추진하기로 했는데, 6년이 지난 지금까지 토지 매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김학현 후손으로부터 이 땅을 매입한 사람은 마침 전직 공무원이어서 이곳의 역사적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이 소유하기보다는 지자체에서 매입한 후 태실을 원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에서는 공시지가가 아니면 불가하다고 하고 현 소유자는 매입과정에서 오갔던 최소한의 비용이든지, 묘지로 쓸 수 있는 땅으로 환지해 주길 원하고 있다. 하루속히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져 영조 태실이 도굴된 지 100년이 되는 2028년 이전에 원위치에 복원될 수 있기를 바란다.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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