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을 기준으로 동쪽의 강릉, 서쪽의 원주에서 한 글자를 따 강원도라 이름이 붙었을 만큼 원주는 오랜 세월 강원 지역 대표 도시로 기능해 왔다. 최근에는 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연이어 조성되면서 지역의 명산 치악산을 따라잡을 듯 높이 솟은 빌딩들이 원주의 도시 풍경을 새로이 그려내고 있는데… 어느 대로변에 들어서자 조선의 기와지붕과 근대기의 서양식 건물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 도시에는 어떤 시간이 축적된 걸까, 그렇게 대로변에 포개어진 시간을 좇아가 보았다.
01. 원주역 급수탑
강원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시절의 흔적들 조선팔도라는 말이 있다. 1895년까지 조선의 광역 행정구역이 8개 도로 구분된 데서 나온 말이다. 조선시대 강원 지역의 중심 관청으로 오늘날 도청의 기능을 한 감영은 원주에 설치됐다.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간 유지된 원주 강원감영(사적) 이야기다.
『여지도서(1795)』에 총 27동 505칸, 『관동지(1830)』 「강원감영도」에는 41동의 건물이 나와 있다고 하는데 그에 비하면 현재 강원감영의 규모는 그 반의반도 안 될 만큼 줄었다. 1896년 8도제가 폐지되고 행정구역이 재편됨에 따라 조선 이궁이 있었던 춘천에 강원도청이 새로이 설치됐다. 텅 비게 된 강원감영은 원주 진위대(鎭衛隊) 본부로 사용되다가 1907년 진위대 해산 후에는 일본 헌병수비대의 차지가 됐다. 그 과정에서 변화가 있었고, 6.25전쟁을 겪으며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02. 포정루 주변 03. 강언감영 선화당 건물
지금은 출입 문루인 원주 강원감영 포정루(사진 02, 시도유형문화유산)와 관찰사의 집무실로 쓰인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사진 03, 보물) 등 일부가 남았다.
감영의 너른 마당에 서서 동서 방향으로 길게 정면 7칸, 측면 4칸, 총 28칸 규모로 지어진 선화당을 바라보면 묘한 스카이라인을 감상하게 된다. 팔작지붕 너머로 직각의 고층 건물이 우뚝우뚝 솟아 있으니 말이다. 그 옛날에 비하면 규모가 한참이나 작아졌다고 해도 세기가 바뀌고, 시대가 전환되고, 세상이 무시로 변화하는 가운데 이 선화당이 건재하단 것이 놀랍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실제 전국의 옛 감영 가운데 선화당이 남아 있는 곳은 강원감영이 유일하다고. 조선 중기 목조 건축물의 원형이 남아 있고, 여러 기록을 통해 변천사를 되짚을 수 있는 선화당은 2021년 보물로 지정됐다.
04. 원일로 05. 서미감병원 시기 선교사들의 숙소
병원, 성당, 은행… 원주에서 마주한 근대의 표정 강원감영 앞 일방향으로 쭉 뻗은 원일로(사진 4)는 원주의 원도심 지역이다. 감영 주변으로 도심지가 형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 그 덕분에 원일로 곳곳에서 시차가 느껴지는 표정을 발견하게 된다.
멀리 가지 않고 감영 포정루 바로 앞 구 자혜의원에서부터 걸음을 시작한다. 1955년 당시로서는 손에 꼽을 만큼 귀했던 개인병원으로 개원한 구 자혜의원은 1980년대까지 원주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추억이 짙은 장소라고 했다.
구 자혜의원보다 훨씬 앞서 원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으로 설립된 원주 기독교 의료 선교 사택(사진 05, 국가등록문화유산)은 원주뿐만 아니라 영서 지역의 의료서비스를 책임졌다. 1913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 활동의 결과물인 이 유산(구 서미감병원)은 지역사회에 의료, 건축, 교육 등 근대 물결이 유입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선교부는 강원감영 인근 동산에 병원과 함께 사택과 교회 등 모두 여섯 채의 건물을 신축했는데 현재는 원주 기독교 의료 선교 사택만 남았다. 옛 병원과 닮은꼴이라는 사택은 1918년 우리가 근대기 서양식 건물의 전형으로 떠올리는 붉은 벽돌조의 2층 주택으로 건립됐다. 20세기 초반 감영 뒷동산 서양촌은 원주 사람들에게 생경하면서도 절로 우러러보게 되는 풍경이지 않았을까.
06, 07. 원동성당 08.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서미감병원이 들어섰던 그해 원일로 한쪽 끄트머리에는 천주교 원주 원동성당(사진 06, 사진 07, 국가등록문화유산)도 모습을 드러냈다. 1896년 현재의 원주가톨릭센터 일대 터와 기와집을 구입해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하다가 1913년 그 맞은편에 고딕양식의 새 성전을 지은 것. 그러나 그때의 원동성당은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지금의 성당은 1954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 원동성당은 1970년대 유신 시절 원주교구 교구장이었던 고 지학순 주교가 내외신 기자 앞에서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양심선언을 한 때를 기점으로 성전을 넘어 원주 지역 민주화운동의 요람으로 기능한 상징적 장소다. 이와 함께 원주가톨릭센터는 문화·예술이 배부른 소리로 여겨지던 그때 시민 모두를 위한 전시장, 공연장으로 운영되며 지역사회의 정서를 살찌웠다.
원주감영에서 맞은편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이곳이 오랜 도심지라는 걸 상기시켜 주는 또 하나의 상징물을 마주하게 된다. SC제일은행 원주지점이다. 반듯한 좌우대칭, 세로가 길어 수직성이 강조되는 창문, 단층이지만 주변의 건물 2층보다 높은 층고 등 일제강점기 은행 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건물은 1934년 구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사진 08,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건립됐다. 원주 최초의 은행이지만 온전한 의미의 은행이라 하긴 어렵겠다.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여 경제권을 독점하고자 설립했던 동양척식회사의 지배를 받으며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은행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눈을 흘기고….
09.원주역 급수탑
옛 원주역과 근대의 이정표가 되어 주는 급수탑 일본과 가까운 남쪽 바닷가의 개항지 부산과 마산을 기점으로 수도 서울로 이어지는 철로가 놓인 까닭에 상대적으로 강원 지역은 수탈과 대륙 침략의 거점 지역에서는 얼마간 비켜나 있었다. 원주에는 1940년에 이르러 첫 기적이 울렸다. 청량리역에서 시작되는 중앙선 양평역~원주역 구간이 이때 개통됐다.
그 당시에는 증기기관차가 선로를 내달렸다. 이에 원주역에는 중앙선을 오가는 증기기관차에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급수탑이 함께 설치됐다. 1930년대까지 급수탑의 전형이 석조였다면, 1940년대에는 원주역 급수탑처럼 철근콘크리트조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디젤기관차가 등장한 1950년대부터 급수탑은 쓸모를 잃게 되었으니 급수탑의 유무와 형태를 통해 얼마간 시대 변화를 감지해 볼 수 있다. 근대화 과정의 유의미한 지표이자 국내 교통사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는 원주역 급수탑(사진 01, 사진 09 국가등록문화유산)은 2004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21년 강릉선 KTX가 원주를 지나게 되며 남원주 IC 인근에 새 역사가 마련됐고, 원일로에 면한 옛 원주역은 폐역이 됐다. 높이 18m의 거대한 급수탑이 더 덜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