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산 자락 황새울, 배티고개, 상백마을에서 흘러온 성대천과 엽돈재, 대삼마을, 강당마을에서 흘러온 백곡천이 용진교 앞에서 만나 백곡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다 백곡저수지에서 잠시 머문다. 골짜기 마을의 옛 이야기가 저수지 윤슬로 다시 살아나나보다. 저렇게 반짝이는 말 없는 말들. 백곡저수지 아래 진천역사테마공원은 고금의 예술이 역사와 함께 숨 쉬는 곳. 지난 봄 모내던 백곡천 이팝나무 뚝방길 아래 어떤 농부의 논이 다 주고 텅 비어 가득하다. 백곡천은 그렇게 미호강으로 흘러들고, 천 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다리로 가는 미호강 물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메타세쿼이아 길을 걷는 연인이 있었다.
초평호 한반도 전망대에서 본 풍경
초평호 한반도 전망대에 올라 산하를 보다 자연을 이르는 말, 산하(山河). ‘산하’라는 말은 자연처럼 순수하고 장엄하다. 그 앞에 서면 가슴 벅차고 때로는 비장해진다. 가슴 벅찬 기억과 슬픔을 억누르고 씩씩하고 장하게 다시 서야 했던 기억들, 지나온 한해를 돌아보며 ‘산하’를 온 가슴으로 느껴본다.
충북 진천 초평호 한반도 전망대에 그렇게 올랐다. 물굽이와 산굽이가 만나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낸 풍경에 그곳의 의미를 국한시키기에는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순수하고 장엄했다.
초평천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며 산줄기를 휘감기도 하고 사람 사는 마을을 품기도 한다. ‘산하’는 그렇게 터전을 내어주고 사람들을 살게 한다. 기쁘고 슬픈 일 다 겪으며 올 한 해도 살아냈던 씩씩하고 장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등꽃처럼 피어난 모든 집들이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것 같다.
전망대에 서서 사방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본다. 초평호에 놓인 출렁다리인 ‘초평호미르309’와 초평호 둘레를 걷는 초롱길의 하늘다리, 초평호를 호위하며 내달리는 산줄기 위에 있는 정자 농암정, 두타산 세 신선이 내려와 훗날 이곳에 배가 뜰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논선암도 보인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두타산에 쌓은 33개의 돌탑에 대한 안내판을 발견했다. 안내글에 따르면 초평면 금오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2003년부터 돌탑을 쌓기 시작했고, 마을 주민 몇 분도 함께 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툼 없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기원하며 33개의 돌탑을 쌓았다. 돌탑을 쌓은 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뜻이 돌탑과 함께 전해지지기를…
의병의 이야기를 싣고 흐르는 백곡천 진천을 진천답게 만드는 또 다른 물줄기가 백곡천이다. 백곡면 갈월리 서수마을 위쪽에서 백곡천의 최상류 물줄기를 찾았다. 빈 논, 좁은 시멘트 농로, 수더분한 마을 사이로 흐르는 도랑 물줄기, 백곡천은 그렇게 시작된다.
백곡천 지류 상류마을 '향나무 우물'. 향나무 아래 우물이 있다.
백곡로에서 엽돈재길로 접어드는 초입에 서수마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비석에 적힌 글에 서수마을 이야기가 새겨져 있었다. ‘서수마을은 서수원이라 한다.’는 문장으로 비석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수원은 엽둔재(엽둔치) 밑 동네이고, 엽둔재를 엽돈고개라고도 불렀다. 고개는 험하고 깊어 조선시대에는 도적떼의 소굴이었다. 임꺽정도 한때 이곳에 은거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안성 사람 홍계남 선생이 의병 수천 명을 모아 이 마을에 주둔하며 왜군과 싸워 승리한 이야기도 전한다. 엽둔치(엽둔재) 부근에 홍계남 의병 부대가 왜군과 싸울 때 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
서수마을을 뒤로하고 백곡천 지류가 시작되는 강당골 마을을 찾아갔다. 인적 없는 곳까지 올라가 물줄기를 따라 마을로 내려왔다. 마을을 흐르는 이름 없는 도랑은 돌담 옆, 밤나무 아래, 사람의 온기 없는 흙벽 드러난 낡은 집을 지나 강당마을회관 앞에 이른다. 마을회관에서 200m 정도 거리에 병자호란 때 수천 명의 피난민을 모아 청나라 군대를 물리친 조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만뢰사가 있다.
강당마을을 지난 물줄기가 백곡천과 만나 노신마을을 앞을 지난다. 제법 냇물의 모양을 이루어 흐르는 백곡천이 논밭을 잇는 낮은 다리 위로 넘쳐 흐른다.
용진교에서 성대천의 시작을 찾아가다 백곡천의 또 다른 지류는 대문리에서 시작된다. 그 물줄기 최상류 대삼마을에는 예로부터 마을을 보살펴주는 상징으로 생각하는 400년 넘은 느티나무도 있고, 마을 사람들이 생명수로 여겼던 이른바 ‘향나무 우물’도 있다.
커다란 향나무와 우물이 있는 곳에서 이 마을 사람들은 정월대보름에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제사를 지낸다. 70년 전 이 마을로 시집온 할머니는 당신께서 시집올 당시 90세가 넘은 분께 들은 얘기라시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조선시대 말에도 이 향나무와 우물은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도 이곳에서 마을 제사를 올렸고, ‘향나무 우물’을 마시고 생활용수로 썼다.(진천읍 산척리 장척마을에도 신비하게 생긴 향나무 고목과 우물이 있다. 그 우물 또한 마을 사람들의 생명수였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며 잔치를 벌인다. 일 년에 한 번 마을 사람들이 모여 무병장수를 빌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와 잔치를 통해 한해살이의 고단함과 즐거움을 나누고 서로 위안했다. 대삼마을 이야기를 싣고 흘러간 이름 없는 물줄기는 백곡천으로 흘러들고, 백곡천은 용진교 앞에서 배티고개에서 시작된 성대천을 받아들여 함께 흐른다. 성대천의 시작을 보러 배티고개로 향했다.
배티고개는 백두대간 금북정맥 줄기다. 금북정맥은 경기도 안성 칠장산에서 충남 태안 지령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1872년 지도에 배티고개를 백치(白峙)로 적고 있다. ‘배나무 고개’인 이치(梨峙)는 1925년에 기록된 이름이다. 1911년 지도에는 배치(倍峙)로 나와 있고 한글로 ‘배테’라고 섰다. ‘테’는 고개를 뜻하는 ‘티’의 사투리라고 한다. 백치에서 지금의 배티고개까지 고개 이름은 세월 따라 바뀌었다.
배티성지
경기도 안성과 충북 진천을 잇는 고갯길, 배티고개. 그곳에서 성대천의 지류가 시작된다. 그 물줄기는 두 번째 조선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와 1800년대에 천주교인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묘가 여러 기 있는 배티성지를 지난다. 배티성지를 뒤로하고 성대천 본류가 시작되는 황새울 마을로 향했다. 현재 학동마을이 황새울마을이다. 옛 마을의 황새 이야기는 아는 사람 없고, 학동마을로 바뀐 이름만 남아 아쉬움을 남긴다. 성대저수지를 지난 성대천은 배티고개에서 흘러온 이름 없는 물줄기와 하나 되어 용진교 앞에서 백곡천과 만난다.
백곡저수지 진천역사테마공원 골짜기 마다 흐르는 이름 없는 작은 물줄기들은 숱한 세월 긴긴 겨울밤 골골이 소곤대던 옛 이야기를 품고 흘러 백곡천이 되어 백곡저수지에 모인다. 골짜기 마을의 옛 이야기가 저수지 윤슬로 다시 살아나나보다. 저렇게 반짝이는 말 없는 말들. 백곡저수지 아래 진천역사테마공원은 고금의 예술이 역사와 함께 숨 쉬는 곳이다.
백곡저수지 식파정을 찾아 숲길을 헤매다 해가 기울어 다음에 찾기로 하고 돌아 나왔다. 식파정은 조선시대 사람 이득곤이 지은 정자다. 1600년대를 살다간 당대 최고의 시인 증평의 김득신이 식파정 중건기를 쓰기도 했다.(식파정 이야기는 다음 호에 소개 한다.)
백곡저수지 아래 백곡천과 진천역사테마공원 풍경
백곡저수지 아래 진천테마공원은 종박물관, 생거판화미술관, 주철장전수교육관 등이 있어 고금의 예술이 역사와 함께 숨 쉬는 공간이다.
‘소망의 종에 꿈을 달자’ 종박물관 앞에 작은 종을 달 수 있는 설치물이 있다. 누군가의 소망을 담은 작은 종들이 달려있다. 종박물관 현관 앞 성덕대왕신종을 축소해서 만든 종은 당목의 줄을 잡고 마음을 담아 직접 울려볼 수도 있다. 종의 울림이 파문처럼 공기를 움직여 퍼져나가는 모양을 상상한다. 이름 없는 종소리가 마음을 울려 누군가를 새기게 한다. 임진왜란 때 백곡천 상류 서수마을에서 왜군을 격파한 의병장 홍계남 선생과 의병들, 병자호란 때 강당골 마을에서 청나라 군대를 격파한 조금 선생과 사람들, 향나무 우물이 있는 마을로 시집와서 할머니가 된 어느 아주머니, 성대천 지류 최상류 배티고개 최양업 신부와 천주교인으로 처형돼 죽은 이름 모를 사람들…,
백곡저수지에 모였던 백곡천은 다시 흘러 신정리 이팝나무길을 만들어 놓았다. 이팝나무꽃이 하얀 쌀밥처럼 피어나는 봄, 백곡천 뚝방 아래 논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며 모를 심는 농부들의 분주한 하루가 반짝이고 있었다.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의 마음은 지난 가을 황금들녘으로 이루어지고, 이제는 다 퍼주고 남은 것 하나 없는 텅 빈 논은 그래서 가득하다.
백곡천이 흘러 미호강과 하나가 되는 모습을 천년 다리, 농다리로 흐르는 미호강 옆 1㎞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어 도착한 미호강 전망대에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