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인성군의 태를 묻은 문의 산덕리 태실 1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7-1. 인성군의 태를 묻은 문의 산덕리 태실
충북에는 조선왕조 세 임금의 태실이 있다. 충주에 있는 경종 태실과 청주에 있는 영조 태실, 그리고 보은 속리산에 있는 순조 태실이 그것이다. 청주에는 영조 태실 외에도 여러 개의 태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문의 산덕리에 있는 인성군(仁城君) 태실이다. 문의에서 청남대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괴곡리 삼거리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염티 방면으로 7㎞쯤 가면 산덕리를 지나게 된다. 산덕리 골말 앞에서 마주 보이는 동그랗게 솟아오른 해발 211m의 나지막한 동산이 바로 태봉산이다. 지번주소로는 산덕리 산411번지이다. 흔히 ‘산딕이’ 또는 ‘산득이’로 불리는 이 외지고 후미진 마을은 신동문 시인의 고향이어서 정감이 가는 작고 아담한 농촌이다. 이 마을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월굴봉(月窟峰)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려온 능선 끝에 봉긋하게 솟은 산봉우리를 볼 수 있는데, 이 산봉우리가 곧 정상부에 태실이 조성된 태봉이다. 산을 일컫는 지명으로 쓸 때는 태봉(胎峰)이라 하고, 태를 묻은 곳을 지칭할 때는 태봉(胎封)이라 한다.

인성군 태실이 있는 태봉 전경(북에서)



이 마을 정면에 있는 태봉에 조성된 태실에 대해서는 『호서승람(湖西勝覽)』 문의 편에 왕자의 태실이 산덕촌에 있다(胎室 王子在山德村)고 하여 조선 후기의 문헌에서 확인된다. 또한, 한글학회에서 1970년에 편찬한 『한국지명총람』 충북 편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에 “태봉; 골말 남쪽에 있는 산, 전에 왕자의 태를 묻었다 함”이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태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92년 6월이다. 당시 청원군 문화공보실에 근무하는 이규상씨가 주민으로부터 산덕리 마을 앞산에 태실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나와 함께 6월 7일 일요일에 현지를 조사하게 되었다. 조사 결과 산덕리 골말 앞에 태봉이라 불리는 산봉우리의 정상에 있었던 태실 내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은 1928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서울로 반출되고 현지에는 태항아리를 넣었던 돌함이 지상에 노출되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태실이 있었던 산 정상부에서 돌함의 뚜껑을 찾아냈다. 다음 일요일인 6월 14일에 다시 현지를 조사하여 태봉산의 남서쪽 약 70m 지점의 논두렁 축대 속에 묻혀 있던 돌함의 몸통 부분을 찾아냈다. 이 사실이 6월 18일에 동양일보에 보도되었다.

산덕리태실 전경



이후에도 수차 현지를 방문하여 태실과 관련된 유물을 찾는 한편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태봉과 태실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수집하던 중에 골말 앞 버스 승강장 옆에 비석 1개가 있었는데 2, 3년 전에 군부대 트럭이 후진하다가 비석을 치어 도랑으로 떨어져 흙 속에 파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이 비석은 그 후 6월 26일에 민성기 문의면장이 산덕리 이장과 함께 장비를 동원하여 버스 승강장 옆에서 발굴하여 문의면사무소로 이전하여 보관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곧바로 문의면사무소로 달려가 비석을 조사해보니 예상대로 산덕리 태실과 관련된 태실비가 확실하였다. 비석은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인 손상을 입었다. 다른 부분은 훼손이 없지만 유독 전면과 후면에 새겨진 비문의 글자들을 일부러 정으로 쪼아서 알아볼 수 없도록 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일제강점기에 태실이 도굴된 후 비석이 방치되어 있어 마을 주민들이 마을 앞 도로변에 세워 놓았는데, 정신질환이 있는 마을의 한 주민이 비문을 망치로 쪼아 내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면서 ‘만력(萬曆)’으로 시작되는 비문의 일부는 기억을 하고 있었다. 태실비의 인위적인 손상은 문화재 파괴일 뿐만 아니라, 태실의 주인공과 조성 연대를 명확하게 밝혀줄 결정적인 증거를 없앤 것이어서 더욱 아쉽다. 그러나 주민의 증언과 함께 돌에 새긴 글자 획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비문은 어느 정도 판독이 가능하였다.
앞면의 비문은 ‘만력십육년무자아지씨태실'이라 새긴 2행 15자로서 12자가 판독되었다. 이 가운데 육안으로 분명하게 판독이 되는 것은 ‘육년(六年)’, ‘무(戊)’, ‘아지씨태실(阿只氏胎室)’ 등 8자인데 ‘만력십(萬曆十)’과 ‘자(子)’자는 탁본과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호와 간지를 비교하여 확인한 것이다. 즉 만력 16년 무자 해인 1588년(조선 선조 21)에 태어난 아기씨의 태실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판독이 불가한 세 글자 중 첫 자는 문맥으로 보아 ‘생(生)’자가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이고, 다음 두 글자는 ‘왕자(王子)’ 또는 ‘왕녀(王女)’로 추정된다. 왕자인지 왕녀인지는 문헌을 조사하면 충분히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석 뒷면에 새겨진 글자는 ‘황명만력십년이월이십오일사시립’이라는 1행 16자로 판독되었다. 이 가운데 육안으로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명(明)’, ‘십(十)’, ‘년(年)’, ‘이월이십오일사시(二月二十五日巳時)’ 등 11자이고 나머지는 탁본과 앞뒤 문맥으로 추정한 것이다. <2부에서 계속>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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