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7-2. 인성군의 태를 묻은 문의 산덕리 태실(산덕리 태실과 관련된 태실비의 손상된 비문을 판독한 결과를) 종합해보면 이 태실의 주인공은 만력 16년 즉 1588년(선조 21)에 태어난 아기씨로서 태를 묻은 해는 만력 연호가 19년에서 끝나므로 17년에서 19년 사이이고, 날자는 2월 25일 사시(오전 9시)로 확인된다. 관례에 따라 아기의 출생 후 3~5개월 후에 장태(藏胎)하는 것이 상례이므로 만력 17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선조 21년에 태어난 아기씨가 누구인지 찾아보면 태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된다.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을 보면 선조는 인목왕후에게서 1남 1녀와 여섯 명의 빈(嬪)에서 13남 10녀를 두었으니 이들 중에 한 명이 이 태실의 주인공이다. 문제는 쉽게 풀리었다. 1588년에는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이 그해 10월 29일에 태어났을 뿐이다. 간혹 후궁에서 태어난 왕자나 옹주의 경우 태어난 날자가 기록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호서승람』 문의현 편에 왕자의 태실이라 분명히 밝히고 있으므로 왕녀를 제외하면 그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그리고 장태한 날이 1589년(선조 22) 2월 25일이므로 인성군의 생후 4개월이 되므로 그 주인공은 명확하다 하겠다. 이후 전주이씨 인성군파 종중에서도 확인하여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인성군은 누구인가? 그는 1588년(선조 21) 10월 29일에 선조와 정빈(靜嬪) 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조에게는 일곱 번째 아들로서 이름은 공(珙)이고 호는 백인(百忍)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선조가 특히 사랑하였으며 공부를 시작하자 학업이 일취월장하였고 한다. 5살 때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왕을 따라 의주로 난을 피해 갔다가, 1597년(선조 30) 평안도 성천으로 옮겨졌다. 이 해 12월 한양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인성군(仁城君)에 봉해졌다. 1603년(선조 36) 3월 9일, 형조판서를 지낸 윤승길의 딸과 혼인하였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과 호성원종공신을 정할 때 인성군은 이복형 순화군, 이복동생 의창군과 함께 호성원종공신 1등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이복형인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옹원과 종부시의 도제조를 맡았다. 그러나 1612년(광해군 4) 길에서 조정의 대간을 보고도 아무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채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1615년(광해군 7) 윤8월 2일에는 역모에까지 몰렸으나 모두 광해군의 비호로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인성군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와 그 아들 영창대군의 폐위 및 사사에도 적극 참여하여 두 사람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는 먼저 영창대군의 사사를 적극적으로 간하면서 영창대군의 죄를 논하는 데에 참석하지 않은 종친들을 파직시킬 것을 간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부터는 종실들을 이끌고 인목왕후의 폐출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인성군 묘(의정부시)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지난 날 인목왕후의 폐위 등에 동조했다 하여 그 처벌이 논의됐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다. 또 인조는 인성군을 항상 숙부라고 부르며 예우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에 출근하던 사헌부의 관리들이 길에서 자신을 보고도 피하지 않자 이를 문제 삼고 감찰을 추고하도록 청하였는데, 이것이 헌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함부로 꾸짖고 욕보이는 바람에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에도 인조의 비호 아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11월에 폐위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올리고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고변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수많은 대신들이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였으나, 인조는 인성군이 역모를 주도한 무리에 가담한 흔적이 없어 벌을 줄 수 없다 하여 계속해서 처벌을 미뤘다. 그러나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는 상소는 이듬해 음력 2월까지 수도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를 이기지 못한 인조는 1625년(인조 3) 2월 23일 유배를 명하였다. 다만 유배지에서도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물자도 부족하지 않게 공급하도록 하였다. 이틀 후인 2월 25일 인성군은 강원도 간성군에 안치되었는데, 이날 인조는 인성군의 아들 해평군에게 직접 인성군이 유배를 가게 된 사정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다음날에는 인성군에게 교자와 어의, 호위병 등을 붙여주는 등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한편 이해 10월 18일 검열 목성선, 승문원 부정자 유석 등이 인성군에게는 죄가 없으니 방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게다가 전날에는 인성군의 유배지에 다녀온 아들 해평군이 인성군이 병으로 고통스러워함을 설명하자, 인조는 인성군에 대해 석방을 명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대간에서 목성선의 상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연이어 반박을 하는 바람에 인성군은 석방되지 못하고 원주로 이배되었다. 이후 인조는 인성군에게 지속적으로 의원과 약, 옷감 등을 보내주었고, 1626년(인조 4) 11월 1일 인성군의 생모 정빈 민씨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인성군을 석방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628년(인조 6) 1월 3일, 당시 세마 허유(許?) 등을 비롯한 이들이 일으킨 역모에 인성군도 참여했다는 고변이 또 들어왔다. 이때는 인목대비까지 나서서 인성군의 처벌을 주청하였고, 종실들도 매일같이 인조를 찾아와 인성군의 처벌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인성군은 1월 21일 전라도 진도에 안치되었고, 다만 그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후 대신들은 계속해서 인성군의 사사를 청하였으므로 결국 인조는 음력 5월 14일 인성군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였다. 인성군은 6일 후인 5월 20일 향년 4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