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인성군의 태를 묻은 문의 산덕리 태실 3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7-3. 인성군의 태를 묻은 문의 산덕리 태실
인성군은 1628년(인조 6) 향년 4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인성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인조는 그 장례를 예장(禮葬)하도록 하였으나, 이 역시 대신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예장을 후장(厚葬)이라고 이름을 바꾸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한편, 계속해서 유배지에 남아있던 인성군의 가족들은 1628년(인조 6) 5월 29일 제주도로 이배되었다. 이후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에 한해 1629년(인조 7) 먼저 방면되었고, 1633년(인조 11)에는 인성군의 장성한 아들들도 모두 방면되었다. 이어 1637년(인조 15) 3월 23일 인성군의 관작도 모두 회복되었다.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현재 인성군의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다. 부인 윤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묘비 및 상석, 문인상, 망주석 등을 갖추고 있다. 인성군의 묘는 1986년 3월 14일 의정부시의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인성군이 궁을 나가 살던 지역을 ‘인성붓재’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것을 한자로 바꿔 인성현(仁城峴)으로 부르다가, 줄여서 인현(仁峴)이라고 하여 현재 서울시 중구 인현동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한다.

인성군 태실비



인성군의 태가 어떻게 서울에서 먼 충청도 문의 땅에 묻혔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아기의 태를 명당에 묻는 풍습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김유신의 태를 묻은 진천 태령산 태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조선왕실에서는 이를 더욱 중히 여겼다. 왕과 동궁의 정실인 비(妃)나 후궁인 빈(嬪)이 아기를 낳을 때는 미리 산실청(産室廳)을 두어 출산준비를 한다. 그리고 출산할 기미가 있으면 내의원 제조가 집사관을 거느리고 아기를 낳을 산전방(産殿房)으로 들어가 길한 방향에 아기를 낳을 산좌(産座)를 설치하고 사방에 순산을 비는 부적을 부치며, 아기씨가 태어나면 다복한 중신으로 권초관(捲草官)을 삼아 산전방에 깔았던 짚자리를 의관으로부터 받아 곱게 말아서 문 위 중방에 매달고 빨간 끈을 드리워 아기씨의 출산을 알린다. 그리고 관상감에서 잡은 길한 날에 아기씨의 수명장수를 비는 은, 쌀, 비단, 실 등을 차려놓고 권초제(捲草祭)를 지낸다.
한편 출생한 아기씨의 태는 바로 백항아리에 넣어 산전방 안에 미리 정해 놓은 길한 방향에 두었다가 관상감에서 잡은 길한 날, 길한 시간에 맞추어 태를 씻는다. 즉 태를 씻는 날, 시간이 되어 도제조를 비롯한 집사관이 산전방 뒤뜰에 서면 의녀(醫女)가 산실에서 태항아리를 들고 나와 자배기에 옮겨 담는다. 그러면 미리 그 달의 길한 방향에서 길어온 물로 태를 백번 씻고 또 향온주(香?酒)로 씻어 다시 백항아리에 담는다. 이 항아리를 속항아리(內缸, 內壺)라고 한다. 이때의 절차는 먼저 작은 백항아리 안에 엽전 한 개를 놓고 그 위에 씻은 태를 담은 뒤, 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를 싸고는 빨간 끝을 묶어 봉표를 하여 의관에게 준다. 그러면 의관은 삼제조(三提調)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큰 백항아리에 솜을 깔고 태항아리를 넣고는 다시 솜을 가득 채우고 초주지(草注紙)로 덮은 뒤 다시 솜을 넣고는 감당(甘糖) 즉 엿을 불에 녹여 밀폐한 다음 뚜껑을 덮는다. 이 항아리를 겉항아리(外缸, 外壺)라고 한다. 그리고 빨간 끈으로 항아리를 네 갈래로 매고 전면에 ‘○년○월○일○시 중궁전中宮殿(또는 ○빈○嬪) 아지씨태야阿只氏胎也’라 쓰고 후면에 삼제조와 의관이 서명한 빨간 패를 달아 넓적한 독에 넣으면 의녀가 산실로 들고 들어가 길한 방향에 모셔둔다.
그리고 관상감에서 풍수지리로 태를 묻을 명당인 태봉(胎峰)과 길한 날, 길한 시간으로 태를 묻는 안태 일정을 잡아 왕의 허락을 받으면, 그에 따라 먼저 선공감의 지휘를 받아 태봉이 있는 지방 관아에서 공사를 시작하는 시역을 하고 토신(土神)에게 후토제(后土祭)를 지낸 다음, 땅을 파는 개기(開基)를 하여 태항아리를 장태할 석함(石函)의 기석(器石)을 놓는다. 그리고 태항아리를 받들고 태봉으로 떠나는 발태일(發胎日)에는 안태사(安胎使) 일행이 시간에 맞추어 내전 남쪽 뜰에 막을 치고 대기하였다가, 왕명을 전하는 내시인 중사(中使)가 태항아리를 들고 나와 승지에게 전하고, 승지가 다시 이를 안태사에게 전하면, 안태사는 이를 막 안에 잠시 봉안하였다가, 나무함 속에 넣어 운반할 가마에 실어 놓고는 발태제(發胎祭)를 지낸다. 제의를 마치면 악대와 횃불을 앞세우고 가마꾼이 태항아리를 담은 목함을 실은 가마를 메고 다음에 안태사, 배태사, 주시관(奏時官), 상토관(相土官), 배태서원(陪胎書員) 등 20명 내지 30명의 관원이 그 뒤를 따른다. 그렇게 하여 태봉에 이르러 정해진 날, 예정된 시간을 기다려 봉송해 온 태항아리와 태의 주인공 생년월일시와 태를 묻는 일시를 기록한 태지석 등을 석함에 넣어 장태한 뒤 흙으로 봉토하고 태신(胎神)을 위한 안위제를 지낸다.
이후 전면에 태실의 이름을, 후면에 태를 묻은 일시를 새긴 태실비를 좌향에 맞추어 세우고 나서 후토신에게 감사하는 사후토제를 올려 태실의 조성을 마치게 된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왕이나 세자, 세손의 태실에 돌로 난간을 두르기도 했으나 세종이 태실에 석물을 설치하면 땅이 흔들리고 맥이 상하니 돌난간을 설치하지 말고 나무로 만들어 썩거든 다시 하는 것을 항식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세조도 이제부터 왕이나 왕세자, 원손의 태실에 돌난간을 세우지 말라고 하였지만, 조선 중기부터 왕의 태실에 위용을 갖추기 위하여 일정한 의식과 절차에 따라 중앙의 대석 위에 공 모양의 중동석과 옥개석을 얹어 태실을 만들고 주위에 전석을 깔고 호석 난간을 둘러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즉 가봉(加封)을 한 것이다. <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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