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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고 착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을사년 새해를 열다
'충북레이크파크 르네상스 : 진천3'

새해를 맞이하며 ‘날마다 새롭게 이루어지는 어질고 착한 일들이 널리 퍼져 모든 것들을 아우르다.’라는 말을 새겨본다. 나라 이름 ‘신라’에 담긴 뜻이다. ‘신라’의 뜻을 펼친 김유신 장군은 진천에서 태어났다. 성암천에서 그의 흔적을 찾은 발걸음은, 신라 화랑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암천으로 이어졌다. 그 걸음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 마음을 품어주는 미륵부처를 만났다. 물길은 미호강 메 타세쿼이아 사랑의 길을 지나 천년 다리, 농다리로 이어졌다. 농다리를 지난 미호강은 ‘은여울 마을’에서 빛나는 은빛 여울을 닮으며 자라는 아이들을 품었다. 천년 뒤에도 날마다 새롭게 무엇인가 이루고 있을 어질고 착한 아이들을 생각했다.

미호강 전망대에서 농다리 방향으로 가는 산길 정자에 올라서서 본 미호강과 메타세쿼이아 길(사진 왼쪽)



성암천 물가에서 태어난 김유신 장군
‘날마다 새롭게 이루어지는 어질고 착한 일들이 널리 퍼져 모든 것들을 아우르다.’ 나라 이름 ‘신라’에 담긴 뜻이다. 나라 이름을 ‘신라’라고 하고 최고 통치자의 이름을 ‘국왕’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지증왕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200년도 걸리지 않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다. 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은 ‘신라’의 의미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일 것이다.
만뢰산에서 발원한 성암천이 진천읍 상계리를 지나는 곳, 태령산 기슭에서 김유신 장군은 태어났다. 김유신 장군의 증조할아버지가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이다. 가야는 신라에 합병됐다. 신라는 합병된 가야의 신분 높은 사람들을 변방으로 이주시켰고, 그 정책의 하나로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가 진천과 연을 맺게 된 게 아닐까? 김유신 장군은 만노군(진천군) 태수, 아버지 김서현의 집무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곳에 큰 담을 쳤다고 해서 ‘담안밭’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담안밭’으로 추정되는 곳에 안내판을 세웠다. 당시의 우물터인 연보정과 김유신 장군의 태실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태령산으로 들어갔다.

김유신 장군 태실



연보정 안내판에 따르면 우물은 직경 1.8m, 최고 높이 2.6m이고 돌로 주위를 둥글게 쌓았다. 우물로 내려가는 계단과 4m 가량의 수로도 있다. 연보정을 보고 태실 쪽으로 산길을 올라간다. 태실로 가는 길은 가파른데다 낙엽이 수북해서 돌과 계단을 덮은 낙엽을 헤치며 조심스레 걸었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 방식이라고 평가된다. 태실에서 겨울나무 사이로 산줄기들이 넘실대는 산하를 본다. 진천읍 벽암리에는 김유신 장군의 사당인 길상사가 있다.
이월면 사곡리에도 김유신 장군의 흔적이 있다. 사곡리 마을회관 앞 550년 넘은 느티나무가 거대하고 친근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느티나무 고목을 뒤로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김덕숭 선생의 효자비를 찾아갔다. 김유신 장군의 흔적인 사곡리 단석과 장수굴로 가는 산길 초입이 효자비 30~40m 전에 있다.
‘진천 사곡리 단석’이 먼저 나왔다. 신라의 화랑들은 명산대천을 돌며 심신을 수련했는데, 이곳은 김유신이 수련을 하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유신이 칼로 무예를 연마하면서 돌을 내리쳐서 돌이 갈라졌다는 이야기의 증거라고 알려진 게 단석이다.
장수굴도 김유신 장군이 화랑 시절 무예를 연마하고 심신을 수련하던 곳이라고 한다. 장수굴은 거대한 절벽의 아랫부분에 굴처럼 파인 곳이다. 장수굴 옆에는 커다란 마애불도 있다. 바위절벽에 새긴 12m의 부처상은 사람을 압도한다.
비들목, 무술, 병무관, 구암천 이야기
광혜원면 구암리 구암천에도 신라 화랑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광혜원면에는 화랑뜰, 병무관, 무술, 비들목, 쏠고개 등 신라 시대 화랑과 관련된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야기를 찾아 구암천을 거슬러 그 최상류로 향했다.
덕성산과 무이산이 감싼 구암리, 구암리에서 시작된 구암천, 구암천 최상류 두 줄기 물길 중 하나는 비들목 마을에서 시작되고, 다른 하나는 무술마을에서 시작된다. 비들목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께 이 일대가 신라 화랑들이 수련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구암리에는 비들목마을, 무술마을, 구암마을이 있는데, 예로부터 구암마을을 병무관, 병목안이라고 불렀다. 병무관 터는 현재 구암마을 동쪽 어디쯤 있었다고 한다. 병무관은 화랑들이 무예를 갈고닦던 연무대였다. 화랑들이 활 쏘는 연습을 했다던 이야기는 인근에 ‘쏠고개’라는 지명으로 남았다. 현재 광혜원면 행정복지센터 일대가 들판이었는데 지금처럼 변했고, 그곳이 화랑뜰이라고 한다. 구암리는 비둘기를 닮은 바위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비들목 마을에 흐르는 실핏줄 같은 구암천 최상류 물길은 무술마을에서 흘러온 구암천의 또 다른 최상류 물길과 만난다. 무술마을 입구에는 ‘무수(無愁)동’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무수동, 시름없는 마을. 시름없는 물줄기는 비들목 마을에서 흘러온 물줄기와 만나 하나 되어 흐른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 뛰어나지만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선하지 못하고 밝지 못한 것들을 정화하며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는 도덕경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 구암마을을 지난 물줄기는 무수저수지에 모였다 다시 흘러 미잠1교를 지나며 미호강과 하나 되어 흐른다.
새 시대를 염원하는 미륵부처를 도처에서 만나다
미호강으로 흘러드는 이름 없는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그 처음에서 미륵부처를 만났다. 진천 노원리 석조마애여래입상, 마을 사람들은 그저 미륵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륵불이 있는 마을은 장수밭골이다. 김유신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던 장수굴이 있는 옥녀봉의 북서쪽 기슭이다. 마을에는 예로부터 미륵불이 오래 전 어느 장수의 모습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환난의 시대 백성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고 새 세상을 열어준다는 미륵신앙의 상징, 미륵불. 장수밭골에서 만난 미륵불이 살갑다.

노원리 석조마애여래입상



장수밭골 미륵불에서 직선으로 약 1.6㎞ 거리, 옥녀봉 동쪽 기슭에 ‘궁동 석조보살입상’이 있다. 사람들이 마을을 보살펴주는 ‘수호불’로 여기고 있는 미륵불이다. 마을이야기를 모은 책에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마을에 머물며 밥을 얻어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해코지는 하지 않았지만 양식은 모두 인민군 차지였단다. 피난민들이 마을에 들어오면 밥도 해주고 피난길에 아이를 낳은 산모와 아이를 돌봐줬다는 대목에서 언뜻 미륵불이 떠올랐다. 고려시대 기황후와 관련된 이야기가 궁동(궁골)이라는 지명과 함께 이 마을에 전해진다.
덕산읍 산수리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바위를 깎아 도드라지게 만든 미륵불이다. 미륵불 앞에 절집을 짓고 통유리창으로 미륵불을 볼 수 있게 했다.
진천읍 지암리 문수암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미륵산에서 발견해서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이 부처상이 발견된 산이 미륵산이니 미륵의 기원이 담긴 미륵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평면 용정리 미호강에서 동쪽으로 약 6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진천 태화4년명 마애여래입상은 도솔천에 머무는 미륵부처가 세상으로 내려와 백성들과 함께 새 세상을 만든다는 미륵불이다. 신라 흥덕왕 5년(830년)에 만들어졌다는, 조성연대가 밝혀진 미륵불이다.
진천읍 신정리 백곡천 남쪽 용화사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7m 높이의 미륵불이다. 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유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송덕불상’으로 여기고 있다. 7m 미륵불 옆 작은 부처상도 미륵불이다.
미륵부처를 찾아다니다 벽오사를 들렀다. 그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와 그 주인공을 만났다. 깊은 골짜기 산속을 지키고 있는 미륵불을 만났을 때와 같이 반가웠다. 병자호란 때 갈 곳 모를 사람들을 모아 만노성에서 청군을 막아낸 조선시대 유창국 선생을 기리는 사당이 벽오사다. 전쟁 속에서 백성들의 이정표가 되었던 사람이 유창국 선생뿐이었겠는가? 환난의 세상 도처에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그 자체가 미륵일 것이다.
은빛 여울처럼 자라는 새 시대의 희망
골짜기 마다 마을마다 흐르는 크고 작은 물줄기는 산하의 핏줄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젖줄이다.
칠장천, 구암천, 장양천, 한천, 백곡천 그리고 이름 없는 작은 물줄기들을 받아들여 흐르는 미호강은 천년 다리 농다리를 만나기 바로 전에 1㎞ 메타세쿼이아 길을 만들었다. 강 옆 1㎞ 메타세쿼이아 길을 보고 있으면 걷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보고 있으면 걷고 싶어지는 길, 숨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길, 혼자 걸으면 깊어지고 함께 걸으면 가까워지는 길, 그 길 끝 미호천전망대에 들러 백곡천과 미호강이 만나는 너른 들녘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정자에 올랐다. 은파금파 빛나는 미호강 물결과 걸어왔던 메타세쿼이아길이 한눈에 보인다. 마음에 간직하고픈 진천의 미호강 풍경이다.
천년 다리 농다리를 지난 미호강이 초평호를 지나온 초평천과 만나 크게 두 번 굽이친 뒤 만들어놓은 풍경, 은여울. 은탄리라는 행정구역 이름보다 우리말로 쓴 ‘은여울’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녹는다. 겨울 이른 오전 햇살 닿는 물결마다 튕겨나는 은빛 산란에 귀를 막아도 여울물 소리가 보인다. 윤슬 위로 피어나는 물안개와 바람에 일렁이는 강가의 억새밭은 꿈결 같다. 이 풍경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젊음 그 자체가 빛이란 걸 아는지? 은여울 마을 반짝이는 은빛 여울 그곳에서 새 시대의 희망인 아이들은 은빛 여울을 닮아가며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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