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7-5. 인성군의 태를 묻은 문의 산덕리 태실 인성군의 태를 봉안하였던 돌함은 몸돌과 뚜껑을 따로 만들었으며 재질은 석회암이다. 몸돌은 높이 76㎝, 지름 118㎝의 규모로 네 귀가 달린 원통형인데 바닥 중심에 지름 9.5㎝의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뚜껑돌은 높이 63㎝, 지름 118㎝로 네 귀가 달린 반구형이다. 이 돌함에 봉안되었던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1928년에 반출되어 고양시 서삼릉을 거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서삼릉에 이봉된 인성군 태실은 표석의 앞면에 ‘인성군태실(仁城君胎室)’이라 새기고 뒷면에는 ‘자청주군용흥면이장 년오월(自淸州郡龍興面移葬 年五月)’이라 새겨져 있다. 본래 문의현이었던 산덕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청주군 용흥면에 속하였으므로 이 태실이 청주 산덕리에서 옮긴 인성군 태실임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내·외의 태항아리는 모두 백자로 제작되었는데, 서삼릉으로 옮겨진 인성군 태실은 시멘트로 만든 둥근 토관으로 돌함을 대신하고 내부 바닥에는 자갈을 깔아 편편하게 한 후 중앙에 네모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태항아리와 지석을 놓았다. 발굴 당시 태항아리는 서쪽으로 넘어져 있는 상태였다.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다행히 전혀 손상된 부분이 없이 온전한 상태이다.
인성군 태실 외항아리(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외항아리는 높이 29.3㎝, 입지름 22.2㎝, 밑지름 17㎝로 입술은 둥글게 말리고 어깨에서 부풀어지다가 밑으로 좁아지는 형태로 어깨 밑으로는 4개의 ‘ㅊ’자 모양 고리가 달려 있으며, 밑바닥은 안굽으로 모래받침 번조이다. 외면에는 봉합천과 주칠끈 자국이 보이며, 입술과 밑바닥에는 유약을 바르기 위해 손으로 잡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다. 태토는 정선된 백토를 사용하였고, 푸른빛이 엷게 감도는 유약이 입혀졌다. 내면에는 물레로 성형한 자국이 보인다. 뚜껑은 높이 9.7㎝, 지름 24㎝로 단추 모양에 가까운 손잡이가 달려 있다. 손잡이 목에는 둥근 구멍이 4개 뚫려 있고, 뚜껑 윗면이 움푹 들어간 형태이다. 외면에는 봉합천과 주칠끈 자국이 남아 있으며, 내면에는 둥근 모래받침이 돌려져 있다. 입술에는 유약을 바르기 위해 손으로 잡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있다. 태토는 정선된 백토에 푸른빛이 엷게 감도는 유약을 입혔다.
인성군 태실 내항아리(사진. 국립고궁박물관)
내항아리는 높이 18.7㎝, 입지름 7.6㎝, 밑지름 9.5㎝로 기형에 비해 입지름이 작은 항아리로 둥근 입술은 외반되었다. 어깨에서 벌어지다가 밑으로 가면서 좁아지는 형태로 어깨에는 ‘C'자 모양의 고리가 4개 달려 있으며, 바닥은 안굽에 모래받침 번조를 하였다. 태토는 정선된 백토에 담청색 투명유가 입혀졌으며 광택이 있다. 입술 내면과 밑바닥에는 유약을 바르기 위해 손으로 잡은 손가락 자국이 보인다. 내면에는 물레로 성형한 자국이 뚜렷하다. 뚜껑은 높이 6.3㎝, 지름 11.4㎝로 단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고 손잡이 목에는 방형에 가까운 구멍 4개가 뚫려 있다. 내면에는 얇고 둥근 테 받침이 돌려져 있다. 입술 일부는 파손되었고, 태토는 정선된 백토에 담청색 투명유가 입혀졌다. 입술에는 유약을 바르기 위해 손으로 잡은 손가락 자국이 보인다.
태지석은 화강암 재질의 오석으로 가로 20.8㎝, 세로 20.7㎝, 두께 4.3㎝의 정사각형 석판 형태이다. 음각한 명문은 5행 36자로 ‘황명만력십육년십월이십구일진시생(皇明萬曆十六年十月二十九日辰時生) 왕자아지씨태(王子阿只氏胎) 만력십칠년이월이십오일간시장(萬曆十七年二月二十五日艮時藏)’이라 새겼다. 즉 1588년에 10월 29일 아침에 태어난 왕자 아기씨의 태를 1589년 2월 25일 이른 새벽에 묻었다는 내용이다. 현지에 훼손이 심한 상태로 남아있는 태실비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현재 인성군 태실은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태항아리를 봉안하였던 돌함을 지하에 매장하고 지상에는 봉분을 조성하는 것으로 복원이 되었다. 그리고 마을 앞에 옮겨 세워졌다가 트럭에 치어 매몰된 후 다시 발굴되어 문의면사무소에 보관하고 있던 태실비도 원위치를 찾아 태실 앞에 세웠다. 다만, 태실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서삼릉에 이봉되어 오랫동안 머물다가 1996년에 발굴조사 후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 결국 인성군 태실은 청주 산덕리와 고양 서삼릉, 그리고 서울 경복궁 내의 국립고궁박물관 등 세 곳으로 흩어진 샘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청주 산덕리에는 태실의 빈껍데기만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인성군의 태를 묻었던 원위치이고 태항아리를 봉안하였던 돌함과 이를 세상에 드러낸 태실비가 현지에 남아 있는 것으로도 한 시대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