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좇아 여행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 화두를 갖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마곡사로 향했다. 그곳엔 다양한 소리가 있었다. 타종 소리, 염불 소리, 풍경 소리 등…. 좀 더 집중하자 바람과 물과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평소 들을 수 없었던 내 마음의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태화산 기슭에 자리한 마곡사 북원의 전경
소리가 깨우는 마곡사의 아침 달빛이 어슴푸레한 새벽. 동녘 하늘에 여명조차 없는 시각. 타종이 시작된다. 첫 음은 묵직하고 중간 음은 나지막하다. 여운이 긴 종소리는 쉬이 멈추질 않고 뒷심을 발휘한다. 끝 무렵엔 소리가 더 깊고 넓다.
01. 마곡사의 새벽을 깨우는 풍경 소리 02. 공주 마곡사 소조사천왕상
청각은 소리에 집중할수록 예민해진다. 조심스레 움직이는 발소리, 바람에 춤추는 풍경, 공간을 휘젓는 바람 소리가 여느 때보다 또렷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염불은 소리꾼이 구음을 읊조리듯 낮게 울려 퍼진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일정한 장단과 선율만으로도 감화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소리의 진원지는 멀지만, 공간을 진동하는 힘이 느껴진다.
바람과 풍경도 소리로써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람처럼 시간이 흐르자 일정하게 반복되는 소리가 다시 산사를 깨운다. 간밤에 내린 눈을 쓰는 비질 소리다.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에 휩싸인 산사는 소리에 이끌려 아침을 맞이한다.
03. 수행공간의 중심 건물인 영산전
수행의 공간, 마곡사 남원 태화산 깊은 골에 자리한 마곡사는 예부터 ‘춘마곡’이라 하여 봄의 신록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엄혹한 한겨울에 신록에 휩싸인 춘마곡을 상상하긴 어렵다. 얼음 속에서 도르르 노래하는 물소리와 배고픈 산새의 울음소리가 산사를 한층 고즈넉하게 한다. 계곡을 따라 줄 선 벚나무도 이 추위만 이겨내면 화사하게 꽃을 피우리라. 어차피 돌고 도는 게 계절이지 않은가. 앙상한 수목이 연둣빛으로 변할 화양연화를 꿈꾸며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마곡사해탈문에 닿는다.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한발 내딛게 된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된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인 640년에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이후 여러 차례 중창됐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폐허가 됐다. 그 후 효종 2년인 1651년에 중건됐고, 정조 때인 1782년에 큰 화재로 다시 소실됐다가 재건됐다.
해탈문 다음은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마곡사천왕문이다. 문 안에 있는 보물 공주 마곡사 소조사천왕상은 불법과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두 눈을 부릅뜬 표정으로 악귀를 밟은 채 오가는 중생들을 내려다본다. 천왕문을 지나자 마곡사를 남원과 북원으로 나누는 마곡천이 길을 막아선다. 남원을 벗어나기 전에 챙겨볼 게 더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 마주하는 보물 공주 마곡사 영산전과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마곡사명부전이다. 영산전은 1651년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키면서 고쳐 지은 것으로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편액은 세조의 글씨라고 한다. 편액 한쪽에는 ‘세조대왕어필’이라 쓴 방서가 남아 있다.
04. 마곡사 깊숙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오층석탑을 빛낸다 05. 아침 햇살이 깃든 범종각과 극락교 06.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대웅보전을 만난다
예불 소리 고요한 마곡사 북원 극락교 건너 북원에 들면 국보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과 층층이 이어진 보물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보물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에 시선이 향한다. 오층석탑은 조성 시기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으나, 양식으로 미루어봤을 때 고려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층부터 5층까지 층마다 새겨진 문양이 달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풍마동’이라 부르는 석탑의 상륜부는 원나라의 라마탑과 비슷한 양식이다.
07.웅장한 대웅보전의 현판
석탑 뒤편에 자리한 대광보전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빛바랜 창호와 단청에 시간이 만든 고색창연한 멋이 배어 있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바람을 이기지 못한 채 땡그랑땡그랑 아우성이다. 대광보전 중앙에 걸린 편액은 청나라 건륭 황제로부터 극찬을 받았다는 표암 강세황의 글씨로, 그는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다. 내부는 불단이 서쪽으로 향한 게 특징이다. 불단 위에는 정교한 닫집과 탱화가 가득 그려져 엄숙미를 더한다. 특히 불단 뒤편의 〈백의수월관음도〉는 높이가 5m에 달해 존엄성을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다.
08. 템플스테이 숙소동에서 본 대웅보전 09. 대광보전 창호
대광보전을 나와 연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중층 지붕의 대웅보전 앞에 이른다. 2층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외관과 달리 통층으로 내부는 생각보다 넓지 않다. 굵은 싸리나무 기둥 네 개가 자리를 차지한 까닭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나무 기둥을 많이 돌수록 극락길이 가깝다고 한다. 이 솔깃한 말에 실제로 많은 신도가 기둥을 쓰다듬고 돌았는지 기둥에 윤기가 반질반질하다.
10. 공주 바람의 길에서 만난 천연송림길 11. 삭발터의 백범 김구 선생 흉상 12.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백련암 마애불
바람 소리, 물소리, 풍경 소리에 길을 나서다 대웅보전 왼쪽으로 내려서면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백범당에 닿는다. 선생은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을 처단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목숨을 건 탈옥에 성공한 선생은 여러 곳을 떠돌다 마곡사로 은신하여 짧게나마 승려가 됐다. 백범당 툇마루에는 선생의 등신상이 서 있고, 옆에는 선생이 쓴 ‘불(佛)’자를 새긴 바위와 광복 이후 다시 마곡사를 찾았을 때 기념으로 심은 향나무가 여전히 푸르게 자리를 지킨다.
백범당에서 계곡으로 향하면 태화산 솔바람을 따라 ‘공주 바람의 길’이 펼쳐진다. 길은 계곡과 나란히 나아간다. 물은 계곡의 주름을 타고 흐르다 와락 뛰어내려 한 뼘 높이의 작은 폭포를 만든다. 보석 같은 얼음 속 물소리가 청아하기 그지없다. 길은 자연스레 삭발터로 흐른다. 선생은 여기서 삭발하며 울었단다.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백범일기』 中
이어진 길은 천연송림욕장으로 연결된다. 송림은 치밀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빼꼼히 드리운다. 송림 끝은 임금이 나올 만한 명당인 군왕대다. 매월당 김시습을 찾아온 세조가 여길 두고 ‘만세 동안 없어지지 않을 땅’이라며 감탄했다 한다. 군왕대라는 이름 덕분일까? 묘한 위엄이 느껴진다.
길은 김구 선생이 출가하여 지낸 백련암에서 맺는다. 암자 양지바른 곳에 백구 한 마리가 추위를 피해 웅크리고 누웠고, 뒤편 큰 바위에는 한 가지 소원을 꼭들어준다는 마애불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 인기척 없는 산사는 적막에 빠진 듯 고요하다. 바람이 풍경을 흔든다. 땡그랑땡그랑~. 그 소리가 산사에 울려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