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우리의 뿌리와 혼이 담긴 소중한 자산이다. 가야금을 통해 전통의 맥을 잇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고흥곤 장인은 바로 그 다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 악기는 우리의 소리가 세계를 울릴 수 있도록 길을 넓히고 있다.
국가무형유산 악기장 보유자 고흥곤
어린 시절 호기심에서 시작된 전통의 길 국가무형유산 악기장 고흥곤 장인의 여정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시작됐다. 어린 시절, 전통 악기를 제작하던 김광주 선생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는 나무와 악기에 호기심을 키웠다. “당시엔 단순히 나무를 만지며 장난치는 아이에 불과했지만, 그 모든 경험이 저를 이 길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전통을 잇는 기초를 다지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20대 초반, 김광주 선생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온 그는 악기 제작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가야금, 해금 등 현악기를 제작하며 그는 전통악기의 모든 면을 이해하고 완성하는 데 몰두했다. 그의 제작 철학은 단순했다. “악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통과 혼을 담은 예술 작품입니다.”
01. 줄을 떠받치고 음정을 조율하는 안족 02. 악기의 좌단 중앙에 비취옥을 장식하는 모습
특히, 그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정악가야금을 10여 년의 연구 끝에 복원하며 전통 복원의 중요성을 세상에 알렸다. 『악학궤범』에 설명된 가야금 도면과 설명을 참고하고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한 정악가야금은 1985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또 통일신라시대에 일본으로 전해진 ‘신라금’을 정창원에서 확인하고 기록을 참고해 풍류가야금을 재현하기도 했다.
“전통을 복원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는 일이자, 미래 세대에게 전통의 뿌리를 물려주는 작업입니다.” 그의 정악가야금 복원은 단순한 기술적 성취를 넘어 전통의 재발견과 지속가능성을 상징한다.
03. [양금] 18세기 조선에 전해진 양금은 그 기원을 유럽에 두고 있어 '구라철사금'으로도 불린다.
양금은 서양에 기원한 악기가 우리나라 음악에 쓰이면서 궁중과 민간으로 퍼져나가 향악기화한 악기다.
현대와 전통의 조화, 새로운 시도 K-pop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오늘날, 고흥곤 장인은 국악이 현대와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다. 그가 제작한 25현 가야금은 양악과 국악의 조화를 위한 대표적인 사례다. 기존의 12현 가야금은 전통 오음계에 기반해 제작되었으나, 25현 가야금은 현대 양악의 음계를 포용하며 새로운 차원의 음악적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25현 가야금은 단순히 전통악기를 개량한 것이 아니라, 국악이 대중음악과 어우러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04. 완성된 가야금 울림통에 악기 현을 거는 모습_부들묶기 05. 부들은 줄을 당겨 양이두나 봉미에 고정하기 위해 무명실로 굵게 짠 끈이다.
그는 현대 공연 환경에서 전통악기가 더 넓은 울림을 전달할 수 있도록 성능 개선에 매진했다. 과거의 악기가 주로 소규모 공간에서 연주되던 데 비해 오늘날의 공연장은 대규모 관객을 수용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울림통과 줄의 재료, 조율 방법 등을 개선해 마이크 없이도 넓은 공간에서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를 제작했다. 그의 노력은 서울시 국악관현악단, 국립국악원 등 다양한 국악 공연 단체에서 채택되며 결실을 보았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로마와 벨기에 박물관 등에 작품을 전시해 전통악기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다. “악기는 우리 문화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우리 악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06. 해금 07. 아쟁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세대의 역할 고흥곤 장인은 전통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후학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의 아들 고승준 이수자는 재료공학과 국악 이론을 전공하며 악기 제작의 현대적 연구를 이끌고 있다.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방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죠.” 고승준 이수자는 전통 악기의 성능 개선과 함께 악기 제작 방법론의 학술적 접근을 통해 전통을 더욱 탄탄히 다지고 있다.
또한 고흥곤 장인은 후학 양성을 위해 자신의 작업 과정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전수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악기를 제작하는 기술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전통과 철학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국립국악고등학교, 대학 국악과 등과 협력해 젊은 국악인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그가 만드는 전통악기는 단순히 제작된 도구가 아니라, 전통을 체득하고 미래로 이어가는 중요한 유산이다. 그는 “우리 전통은 K-pop의 뿌리입니다. 전통이 튼튼해야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라고 강조하며, 전통을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로 바라보고 있다.
08. 25현 가야금 09. 정약가야금
전통을 통해 빚어낸 미래의 울림 고흥곤 장인은 전통이 단순히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다리임을 들려주었다. 그의 작업실에서는 10년간 건조한 오동나무, 수백 번 꼬아낸 명주실, 손끝의 섬세함으로 만들어진 악기들이 전통의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는 오늘도 전통을 이어가며, 국악이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길을 열고 있다. “전통은 살아 숨 쉬는 문화입니다. 그 문화를 미래로 이어가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손끝에서 우리 문화의 밝은 미래를 느낀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고흥곤 장인, 그의 ‘울림’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마음도 울리길 기대한다.
[국가무형유산 악기장]
악기장이란 전통음악에 쓰이는 악기를 만드는 기능 또는 그런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고구려 벽화 등을 통해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에 ‘악기조성청’이라는 독립된 기관을 설치하여 국가에서 필요한 악기를 제작해 사용했다. 우리나라 국악기는 60∼70종으로 가야금과 거문고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국가무형유산 악기장은 현악기 제작과 북 제작, 편종·편경 제작으로 나뉘며, 고흥곤 등 8명의 보유자와 3명의 전승교육사가 전통 악기 제작 기술을 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