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9-1. 폐가에서 문화재로, 옥산 수천암 수천암은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들고 지금은 별서가 된 집이다. 혼자만 사용하기 미안해서 문을 활짝 열었더니 주민의 쉼터가 되고 작은 공간 속에 울림이 큰 문화 사랑방이 되었다.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환희리 내안 마을에 있는 수천암(水泉庵)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8호로 지정된 전통 한옥이다. 당호에서 알 수 있듯이 집은 본래 절이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밀양박씨의 재실로 알고 있고, 지역에 오래 살고 나이 지긋한 사람은 밀양박씨의 선조인 강수(江?) 박훈(朴薰)의 묘소를 관리하던 산직이가 살던 집으로 기억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집을 내안 산직이집으로 불렀다. 내가 대학시절까지 살았던 산직이 한씨는 아주 성실하고 시제 때마다 제수를 정성스럽고 풍족하게 장만한다며 집안 어른들이 칭찬하는 사람이었다.
집안에서도 이 집을 산직이집 또는 재실로 불렀는데 옛날에는 절이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졌다. 지금도 처마 밑에 ‘수천암’이라 새긴 편액이 걸렸으니 절이었음이 분명하다. 언뜻 보면 당호(堂號) 같기도 하지만 ‘절 암(庵)’자를 쓰는 암자로 지어졌고 실제 이 절에 살았던 선정조사(禪定祖師)의 사리탑도 현존한다. 수천암이 본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분암으로 지어졌고 실제 암자로 사용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빙자료들이다.
전국 유일의 분암인 수천암 전경
‘분암(墳庵)’이라는 용어는 일반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사학자들의 연구조사를 통하여 조선시대에 매우 많이 경영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분암은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에 수없이 나타나며 지금도 사찰의 형태로 간혹 남아있다. ‘분암’의 ‘분(墳)’은 무덤, ‘암(庵)’은 암자를 말하니 ‘무덤가에 있는 암자’를 말한다. 다시 풀어보자면 ‘선영의 묘역 주위에 건립되어 묘소를 지키고 선조의 명복을 빌며 정기적으로 제를 올려주는 불교적인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인 시설이므로 당연히 스님이 머물러 있고, 주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분암은 재궁(齋宮), 재암(齎庵), 능암(陵庵), 재사(齋舍) 등으로도 불렸는데, 연원을 찾자면 분명 삼국시대 이후 계속되어온 왕실의 원당(願堂) 또는 원찰(願刹)의 경영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받아들여 지역마다 다른 종교와 이념과 사상의 통일을 도모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나라를 통치하는데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그래서 삼국의 사찰은 모두 왕실에서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는 곧 국왕이 사원을 직접 세우고 관리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후 신라말기에 이르러 지방호족과 군벌이 할거하면서 지역마다 대규모 사찰을 짓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고, 이 사찰들은 모두 호족세력의 근간이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이러한 유습이 남아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을 폈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비록 원찰을 두었지만 법적으로는 원찰의 운영을 금지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파생된 것이 분암으로 조선시대의 사대부나 관료들의 집안과 문중에서 분암을 세워 불교식 상례와 장례를 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분암은 죽은 이의 묘소를 관리하고 명복을 빌며 승려로 하여금 제를 지내게 했던 시설이었으나 한때는 유생들의 시회(詩會) 또는 강학장소, 또는 문집이나 족보를 편찬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원찰이란 창건주가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특별히 건립한 절을 말한다. 진영(眞影)을 모신 건물을 중심으로 할 때에는 ‘원당’이라고도 하며, 대궐 안의 원당은 내불당 또는 내원당이라 한다. 신라에는 불교 공인 전인 소지왕 시절에 내불당이 있었다. 544년(진흥왕 5)에 완공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 신궁(新宮)을 지으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553년에 완성한 황룡사(皇龍寺), 635년(선덕여왕 4)에 창건한 영묘사(靈廟寺) 등은 모두 왕실 원찰이었다.
또한, 감은사(感恩寺)는 문무왕의 명복을, 봉덕사(奉德寺)는 무열왕의 명복을, 봉은사(奉恩寺)는 진지왕의 명복을, 동화사(桐華寺)는 민애왕의 명복을, 보림사(寶林寺)는 헌안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다. 그리고 송화방(松花房)은 김유신의 명복을, 장의사(壯義寺)는 장춘랑(長春?) 및 파랑(罷?)의 명복을, 자추사(刺秋寺)는 이차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된 원찰이었다. 감산사(甘山寺)는 김지성 일족의 명복을, 김효양이 세운 무장사(?藏寺)는 그 작은아버지의 복을, 법광사(法光寺)는 김균정의 복을 비는 원찰이었다. 경북 합천 읍내의 황우산 기슭에 있는 연호사(煙湖寺)는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古?炤娘)과 신라 장병 2천명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지은 원찰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의 대야성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남쪽 석벽 위에 위치하고 있다. 고타소랑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이며 김유신의 생질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남편인 품석과 함께 대야성에서 백제군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백제를 반드시 멸망시켜 딸의 원수를 갚을 결심을 하였고, 결국 김유신으로 하여금 대야성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647년 백제를 쳐서 포로로 잡혀 있던 백제 장수 8인과 고타소랑 부부의 유골을 교환하여 왔다. 그리고 마침내 660년(태종무열왕 8)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멸하였다. 이처럼 대야성에서의 고타소랑의 죽음은 신라 왕실의 명예 회복과 삼국통일의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대야성의 남쪽에 고타소랑 부부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연호사를 세운 것이다. 이러한 왕실의 사원을 관리하기 위해 신라에는 원당전(願堂典)이라는 기구를 두고 원찰에 관여하였다. 중대 초기에 성립, 내성(內省)에 속하였다가 뒷날 어룡성(御龍省)에 편입된 이 기구에는 대사(大舍) 2인, 종사지(從舍知) 2인의 관원이 있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