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시 찾은 보물]
폐가에서 문화재로, 옥산 수천암 2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9-2. 폐가에서 문화재로, 옥산 수천암
고려시대에도 왕실 및 귀족들에 의해 계속 원찰이 건립되었다. 왕실에서는 왕과 왕비의 진영을 모신 진전(眞殿)을 사원에 세웠으니 진전사원(眞殿寺院)은 곧 왕실의 원찰이었다. 고려 왕실에서는 많은 왕과 왕비를 위하여 원찰을 건립하였거나 기존 사찰에 진영을 봉안하고 제를 올렸다. 태조 왕건의 진영을 봉안한 개성의 봉은사(奉恩寺), 신명왕후 류씨의 장단 불일사(佛日寺), 현종의 개경 현화사(玄化寺), 헌애왕후 황보씨의 개경 진관사(眞觀寺), 안종의 개성 중광사(重光寺), 문종의 풍덕 흥왕사(興王寺), 예종의 개성 안화사(安和寺), 원혜왕후 김씨의 개경 대운사(大雲寺), 인예태후 이씨의 개경 국청사(國淸寺), 인종과 공예태후의 영통사(靈通寺), 숙종과 명의태후의 개경 천수사(天壽寺), 고려조종(高麗祖宗)의 진영을 봉안한 개경 해안사(海安寺), 의종의 개성 선효사(宣孝寺), 강종의 개성 현성사(賢聖寺), 고종과 원종의 진영을 봉안한 경령전(景靈殿), 명종의 개경 용흥사(龍興寺), 충렬왕과 제국공주의 개경 묘련사(妙蓮寺), 충혜왕과 덕녕공주의 개풍 신효사(神孝寺), 충숙왕의 개경 광명사(廣明寺), 기황후(奇皇后)의 진영을 봉안한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공민왕의 개경 보제사(普濟寺) 등 많은 원찰들이 문헌기록상에 나타나고 있다.

수천암 전경



이들 진전사원에는 왕과 왕비의 진영을 봉안하고 기일마다 불교식 재(齋)를 올려 명복을 빌었고, 기일에는 흔히 국왕이 행차하였으므로 시설을 화려하게 하고 중요시하였다. 이밖에도 고려에는 귀족들의 원찰이 있었는데, 1245년(고종 32)에 최우가 강화에 건립한 선원사(禪源寺), 벽란강변에 세워졌던 이지영의 원찰 보달원(普達院), 충렬왕 때 조인규가 과천에 세웠던 청계사(淸溪寺), 고용봉이 전주에 중창하였던 보광사(普光寺) 등은 그 대표적인 원찰이었다.
원찰의 건립은 조선시대까지도 계승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그의 능인 정릉 근처에 전각이 170칸이나 되는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왕후의 명복을 빌었는데, 후에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신덕왕후를 증오한 나머지 지금의 서울 정동에 있던 능을 도성 밖 양주(현 성북구 정릉)로 이장하였다. 이장한 정릉에 원찰이 다시 생긴 건 정조 때라는 설이 있고 그 이전이란 설도 있지만, 어쨌든 아리랑 고개에 있는 흥천사(일명 신흥암), 북악터널 가는 방향에 있는 봉국사(일명 약사암), 청수장에서 가까운 경국사 등 3개 사찰이 모두 정릉의 원찰로 전해지고 있다. 세 절 모두 정릉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다 보니 서로 정릉에 대한 재를 올려 후대 사람이 그렇게 추측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릉에 흥천사를 원찰로 삼은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역대 왕이나 왕비의 능 근처에 원찰을 건립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까지도 원찰에서 생기는 폐단이 많았으므로 원당을 일절 금할 것을 법으로 정하여 원찰의 건립을 금지하였으나 후대에도 원찰은 많이 있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옆에는 보덕사(報德寺)라는 작은 절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의 기능을 계속하여 수행하고 있다. 단종을 죽이고 왕에 오른 수양대군 세조의 능은 바로 수목원으로 유명한 남양주시 광릉이다. 세조가 죽자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세조의 능을 보호하기 위해 고려 초에 창건된 운악사(雲岳寺)에 89칸의 전각을 증축하고 절 이름도 선왕을 받든다는 뜻으로 봉선사(奉先寺)라 바꾸고 광릉의 원찰로 삼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남양주시에 있는 봉영사(奉永寺)는 본래 신라 때 창건된 봉인사였는데, 1755년(영조31년)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의 묘가 순강원(順康園)으로 승격되면서 이 절을 인빈의 원찰로 삼고 절 이름을 봉영사로 바꾸었다. 김포 금정사(金井寺)는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과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인 장릉(章陵)을 수호하기 위한 원찰이고, 서울 석관동에 있는 의릉은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으로서 원찰은 연화사(蓮花寺)이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용주사(龍珠寺)는 사도세자의 원찰로 잘 알려진 절이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는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화산으로 옮기고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밖에 최근 발굴조사를 실시한 영암 월산사지에서는 ‘월산대군 인수대비’ 등의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다수 출토됨으로써 발굴조사단에서는 월산사가 조선 전기의 왕실 원찰로서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민간인의 분암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과 각종 문집 또는 편지글, 시, 비문, 중건기 등의 문헌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성행하였던 분암은 거의 없어지고 현존하는 것으로는 경기도 파주에 있는 파평윤씨 정정공파의 분암인 성재암(聖在庵)과 함안조씨의 오봉사(五峰寺) 등이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분암으로서 아니라 일반 사찰로 운영되고 있다. 청주 수의동에 있는 청룡암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이름을 올린 박숭원의 분암이었으나, 지금은 일반 사찰로 운영될 뿐이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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