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나의 나라
도심 속 섬처럼 고요한 궁궐에서 봄 향기에 취해 봄
'자연을 닮은 궁궐, 꽃과 향기를 발하다'

봄의 향기는 ‘풋내’다. 풋내는 흙내와 뒤섞일 때 향이 더 짙어지는 법. 그래서 찾은 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창덕궁과 사적 창경궁이다. 매화, 산수유, 살구꽃, 개나리… 온갖 봄꽃이 푸지다. 꽃 대궐이 따로 없다. 고궁의 매력은 사계절 다르지만, 특히 3~4월이 유난스럽다. 봄 향기 가득한 궁궐에서 온몸에 푹내를 띠고 걸어볼 일이다.

칠분서와 삼삼와 앞에 홍매화가 아름답게 폈다 ⓒ서울관광재단



창덕궁에 봄 내음이 물씬하다. 움츠렸던 꽃망울이 터지면서 창덕궁이 울긋불긋해졌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 5)에 법궁인 사적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됐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버린 이후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258년간 실질적 조선의 정궁이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다른 궁궐에 비해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데다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룬 자연적 건축미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01. 행각에서 바라본 창덕궁 인정전 전경
02. 희정당 남행각 현관의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과 화려한 단청 03. 화려한 단청과 샹들리에가 눈길을 끄는 희정당 내무 응접실



현재 창덕궁은 보수·정비 공사 중인 보물 창덕궁 돈화문을 대신해 금호문이 임시 입구로 사용 중이다. 금호문 너머 천연기념물 창덕궁 회화나무 군이 여전히 건재하다. 이들 나무는 1820년대 중반에 제작된 국보〈동궐도〉에도 노거수로 등장한다. 금천교 주변에는 봄의 전령, 매화와 산수유꽃이 봄을 노래한다. 궐내각사 외부 담장을 따라가면 봉보당 뜰 앞에 있는 천연기념물 창덕궁 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향나무는 특유의 강한 향 덕분에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창덕궁의 향나무는 수령이 약 750년 정도로 추정된다. 본래 사방으로 가지가 한 개씩 뻗었으나 남북 쪽 두 가지가 없어졌다.

04. [국가유산 이야기] <동궐도>는 창덕궁을 세밀하게 그린 궁궐 그림이다. 특히 궁궐에 식재된 식물의
위치와 건물 배치, 전경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해 고증적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림에 표현된 나무는 3,000여 그루다.



보물 창덕궁 인정문 뒤로는 국가의 공식 행사가 열리던 국보 창덕궁 인정전이 있다. 경복궁의 근정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위엄은 그에 못지않다. 좌우 행각에 둘러싸여 도심의 소음은 들을 수 없다. 섬처럼 고요하다. 인정전을 지나 편전인 보물 창덕궁 선정전에 닿는다.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임금의 권위를 나타내는 청기와를 올려 품격을 높였다.
보물 창덕궁 희정당의 본래 용도는 침전이었으나 대한제국 시기 왕의 집무실로 활용됐다. 전통 궁궐 건물에서 볼 수 없는 낯선 요소가 많은 이유다.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는 포치형 현관, 근대식 조명과 가구로 꾸민 접객실, 유리창, 서양식 벽지 등이 그렇다. 그중 화려한 채색이 인상적인 남행각 현관에 시선이 머문다.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오얏꽃을 가운데 두고 오방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됐다.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꽃을 볼 수 있으니 궁궐에 감도는 향기는 비단 꽃의 전유물이라 할 수 없다.
조선시대 탐매객도 부러워할 꽃 대궐
창덕궁에는 ‘꽃담’이 여럿 있다. 이는 벽돌이나 돌 등으로 문양을 만들어 장식한 담장이다. 보물 창덕궁 낙선재는 창덕궁의 여러 꽃담 가운데 수작으로 꼽힌다. 거북의 등껍데기 문양을 닮은 ‘귀갑문’, 낙선재 누마루 아래 아궁이 옆 벽면을 장식한 ‘빙렬문’, 낙선재 후원의 화계와 상량정·한정당·취운정을 경계하는 꽃담이 대표적이다. 낙선재는 문살도 챙겨봐야 한다. 단아하면서도 멋스러운 문살이 용도와 규모에 따라 날살문, 띠살문, 완자문, 아자문 등 다채롭게 적용되어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05. 봉보당 뜰 앞에 있는 창덕궁 향나무 06. 칠분서 앞에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폈다. ⓒ서울관광재단



창덕궁 성정각 맞은 편에 있는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의 꽃담도 화려하다. 하지만 이맘땐 꽃담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핀 진짜 봄꽃을 탐할 때다. 특히 매화가 일품이다. 선비들은 봄에 매화를 좇아 ‘탐매’를 즐겼다지만 정작 궁궐엔 언감생심 발을 들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곳 홍매는 꽃잎이 겹으로 피는 만첩홍매이다. 고색창연한 칠분서를 배경 삼았기에 한층 멋스럽다. 이때를 놓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이 일대는 일약 ‘핫플’로 등극한다. 맞은편 성정각 자시문 앞에 핀 매화도 놓칠 수 없다. 비좁은 공간에 터를 잡아 마음껏 가지를 뻗지 못한 탓일까? 모습이 옹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겹겹이 에워쌀 정도로 인기가 많다. 수령이 400년에 이르는 이 매화는 명나라 13대 신종 황제가 조선 선조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07. 취운정에서 바라본 낙선재 풍경 ⓒ국가유산청



봄꽃 향기 피어오르는 창덕궁 후원
꽃 대궐을 뒤로하고 후원으로 이동한다. 후원은 시간도 사람도 숨 가쁜 서울에서 유난히 느린 시간과 고요한 풍경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후원은 그저 하릴없이 풍경에 취하고 싶을 때 찾으면 좋다. 더불어 요즘 후원은 봄꽃 향기까지 스멀스멀 올라오니 이보다 더 좋은 때가 또 있을까!

08. 창덕궁 부용지 권역 전경 ⓒ국가유산청



길을 따라 내려서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라는 ‘천원지방’을 표현한 부용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주변에 부용지에 두 다리를 담근 보물 창덕궁 부용정, 개방감이 탁월한 영화당, 화려한 어수문과 화계가 인상적인 보물 창덕궁 주합루가 한껏 멋을 부리고 둘러앉았다. 부용지를 벗어나면 또 다른 네모난 연못, 애련지에 닿는다. 그 옆으로 보물 창덕궁 연경당이 연결된다. 궁궐 전각에 비해 소박한 이곳은 조선의 남녀유별에 따른 가옥 배치 등 가옥규제에 관한 법령을 충실히 따라 지었다. 연경당을 통과하면 관람지와 존덕지가 마중한다. 이들 연못엔 정자 전시장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다양한 정자를 볼 수 있다. 부채꼴의 관람정, 겹지붕에 6각 지붕을 얹은 존덕정, 깎아놓은 듯 반듯한 폄우사가 그것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창경궁과 경계한 담장 앞에 높이 12m가 넘는 천연기념물 창덕궁 뽕나무가 있다.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장할 목적으로 심은 것이다. 수형이 빼어나 가을날 단풍이 특히 아름답다.
사철 봄의 향기를 발산하는 창경궁
적 창경궁도 창덕궁 못지않은 봄꽃놀이 명소다. 창경궁은 2023년 기준, 우리나라 궁궐 가운데 수목 수가 가장 많은 52,464그루로 조사됐다. 그러니 탐매에 야단법석인 창덕궁보다 봄 향기를 만끽하기엔 제격일 수 있다. 게다가 창경궁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까지 덤으로 구경할 수 있다.

09. 창경궁은 사진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10, 11. 순종 시기에 개관한 대온실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1909년에 건축된 국가등록문화유산 창경궁 대온실은 반듯반듯한 서양식 정원과 한몸처럼 맞닿아 있다. 새하얀 목조 뼈대에 유리를 끼워 마감해 고궁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모습이 새하얀 웨딩드레스처럼 마냥 멋스럽다. 온실엔 천연기념물, 야생화, 자생식물 등이 자란다. 한겨울에도 동백꽃을 볼 수 있으며 2월부터는 매화, 영춘화, 홍천조 등 봄꽃이 꽃망울을 터트려 계절을 잊게 한다.
발걸음을 돌려 옛 동궁 권역으로 향한다. 창경궁이 제 모습을 잃기 전까지 궐내각사의 수많은 전각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나무만 울창하다. 나무 사이로 보물 창경궁 관천대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숙종 때 세워진 천문관측대로 조선시대 천문대 양식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발걸음이 어느 순간 창경궁의 키 큰 향나무 앞에 멈춰 선다. 향내가 물씬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노래한 나태주 시인은 저서『봄이다, 살아보자』 서문에 이런 글을 남겼다. “봄의 느낌으로 살아볼 일이다.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에도 봄의 느낌으로 살아보자.” 그렇다. 향나무처럼 우리도 향기를 품고 산다면 날마다 순간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 내 환경이 봄이 아니라도 봄의 향기를 발산하며.

EDITOR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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