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9-3. 폐가에서 문화재로, 옥산 수천암 청주 수천암 역시 조선 중기에 세워진 분암으로서 밀양박씨 강수 박훈의 묘소를 수호하고 집안의 복을 빌기 위해 운영되었다. 이 암자의 명칭을 왜 ‘수천암’이라 하였는지는 문헌기록에 없으나 수천암 마당 좌우에 하나씩 2개의 오래된 우물이 있고 깨끗한 샘물이 끊임없이 샘솟아 지금도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리고 수천암 창건 초기에 선정조사라는 스님이 살았는데, 도술을 부릴 정도로 수행이 매우 높았던 선승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실제 그와 관련된 전설이 예전에 ‘전설 따라 삼천리’같은 단막극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어쨌든 선정조사는 수천암 창건 당시 주재하던 스님으로 박훈의 묘소와 주변 산지를 수호하면서 박훈의 명복을 빌고 그 후손 집안이 발복하길 빌어 주면서 상생 관계로 절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선정조사 이후에는 어떻게 관리되었는지 뚜렷한 자료가 없어 상고할 수 없다. 선정조사의 부도(浮屠)는 수천암 바로 옆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매년 음력 7월 21일 오후 4시쯤에 박훈의 후손 문중인 밀양박씨 문도공파 종친회에서 인근 사찰의 스님을 초청하여 부도제를 지낸다.
선정조사 부도
부도의 형태는 조선시대 일반형인 석종형(石鐘形)으로 기단부와 탑신, 개석 등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석에 가까운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있는 기단석에는 24잎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기단석 밑 부분은 부연처럼 각출되어 아래 지대석의 윗면 홈에 결구되도록 하였다. 석종형의 탑신은 매우 팽창되어 거의 구형(球形)에 가까운 형태이다. 탑신석 위에는 판석형의 8각 갓돌이 있고 그 위에 원래의 탑신 위를 장식하였던 상륜석(相輪石)이 놓여 있다. 크기는 현재 전체높이가 1.8m이나 본래는 이보다 약간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천암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박훈이 모친 죽산박씨의 상을 당한 후 크게 슬퍼한 나머지 42일 만에 별세하자 이 모자의 명복을 빌고 묘소를 수호하며 제를 지내기 위하여 수천암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수천암 앞쪽 들녘의 지명이 ‘절앞들’인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절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도 수천암 처마에 걸려 있는 편액이 수백 년은 족히 돼 보이고, 1914년에 수천암을 중수하고 그 해에 기록한 중수기에도 예전부터 걸려있던 이 편액을 다시 걸었다는 내용이 있어 조선 말기까지 계속하여 수천암이 운영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14년에 크게 중수한 이후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회의 장소로 자주 이용된 듯하다. 현재 오송읍에 있는 종친회 사무실에 보존된 고문서들 가운데 50여 장의 통문(通文)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선조의 시제 하루 전에 수천암에서 재숙(齋宿)하고 이른 아침에 제사를 집행하라는 내용들이 자주 보인다. 통문의 작성 연대는 대체로 1900년대 초로 중수하기 이전인 1914년 이전의 것도 보여서 재궁으로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재궁은 곧 분암을 말한다. 집안에서는 공부할 만한 아이들을 모아 이곳에 유숙시키면서 인재를 양성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박훈과 그의 부친 박증영의 유고를 모아 편찬하였던 ‘눌재강수유고목판’도 이곳에서 판각하여 보관하였던 것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지금은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수천암의 정면 모습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수천암은 이후 산직이가 살면서 박훈과 그 후손들의 산소를 관리하고 시제 때 제물을 차리는 일을 하였다. 나도 어린 시절에 가끔 아버지를 따라 수천암에 가면 산직이가 큰절로 맞이하고 시제 후에는 반드시 봉송을 따로 지게에 지고 우리 집에 와서 전해주곤 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70년대 말인지 80년대 초에 그 산직이가 사망하고 나서 수천암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빈집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일찍 죽었고 손자가 간혹 세간을 들여놓고 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손자는 자신이 태어난 집이기도 하여 애착심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오래된 한옥에 사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또 산직이라는 신분에 대한 거부감도 있어서인지 연락도 없이 떠나버려 수천암이 방치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