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10-1. 다시 찾아야 할 보물 무심천 남석교 세계문명을 일으킨 도시들의 공통적 특징은 큰 강을 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들 역시 하천을 끼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산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산과 계곡과 하천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이다. 산천이 너무 험해도 아니 되고 너무 협소해도 큰 도시가 형성되기에는 부족하다. 풍수지리학의 기본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이듯이 우리나라의 역사 깊은 도시는 하나같이 산이 있고 물이 있다. 산과 물 모두 도시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지만 특히 물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역사 도시는 모두 하천을 끼고 있다.
서울에는 북악산과 한강이 있고 청주에는 우암산과 무심천이 있다. 단언컨대 이들 산천이 없다면 청주라는 도시가 없고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우암산이 청주를 지켜온 진산(鎭山)이라면 무심천은 청주 역사의 탯줄이며 젖줄이다. 오늘도 말없이 무심하게 흐른다하여 이름마저 무심천이지만, 그 물길 속에는 청주의 역사가 있고 오늘이 있고 또한 미래가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무심천은 가덕 내암리 적현(赤峴)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금거리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형에 따라 꼬불꼬불 곡류하다가 상대리에서 북쪽으로 꺾여 청주 시내를 거쳐 까치내(鵲川)까지 북류하여 진천에서 흘러온 미호강에 합류하는 금강 제2지류인 지방하천이다. 평상시에는 물이 그리 많지 않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물이 불어나 거센 물결을 이룬다. 따라서 무심천은 청주의 중심을 지나 흐르며 청주의 역사와 문화를 잉태하고 키우며 늘 함께 해왔다. 무심천 언저리에는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삶의 발자취가 쌓여 오늘날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선사시대부터 인류의 주거지가 되어 곳곳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상당현이었다가 이후 신라가 차지하여 한강유역 진출에 교두보가 되었고, 삼국통일을 이루자 신문왕 5년(685) 이곳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여 중서부 지역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물론 청주의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하여 서원소경이 설치되고 후에 서원경으로 승격되었다가 고려시대 이후에는 청주목(淸州牧)이 되었겠지만, 그보다는 먼저 청주의 문화적 기반이 확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 기반을 형성하는데 무심천이 있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1910년대의 남석교와 행인
청주의 문화유산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무심천에 걸쳐 있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직접적으로 무심천변에 형성된 유적이 아니더라도 무심천 또는 그 지류를 가까이에 두고 있다. 무심천에 가로놓인 남석교를 비롯하여 무심천을 해자로 삼았던 정북동토성과 청주읍성, 그리고 무심천변에 터를 잡았던 많은 사찰유적들이 당시의 자취로서 역사를 증명한다. 무엇보다 무심천에 가설되었던 남석교는 청주읍성과 함께 과거 청주의 모습을 상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남석교는 언제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청주의 관문과 같은 위치의 무심천에 가설된 돌다리로 지금은 석교동 육거리시장 한복판에 매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무심천 제방을 원래의 위치보다 남쪽으로는 지금의 청남교, 서쪽으로는 지금의 모충대교로 약 200m씩 옮겨 축조하면서 다리 밑을 흐르던 물이 마르고 교량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노천에 방치되었다가 끝내는 흙으로 메꾸어 시가지를 조성함으로써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점차 사라지고, 청주시지 등의 기록에만 남게 되었다.
1910년대의 무심천과 남석교
1989년경으로 기억된다. 하루는 KBS청주에 근무하는 이장종 프로듀서가 나를 찾아와 남석교를 취재해 보자고 하였다. 당시로서는 매우 놀라운 제안이었다. 하수구 맨홀 뚜껑을 열고 들어가서 남석교가 어떤 상태로 있는지 살펴보고 카메라에 담아 특집으로 방송하겠다는 흥미로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카메라 감독과 함께 방수복을 입고 머리에는 방독면을 쓰고 좁은 맨홀 속으로 들어가 간신히 몸을 움직여 살펴보니 남석교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비좁은 공간 속에 피사체가 너무 가까워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이었지만 뜻깊은 경험이었고 방송이었다. 남석교의 대부분은 땅속에 매몰되고 하수구가 지나는 부분에서 상판석의 하부와 돌기둥, 그리고 상판석을 받치기 위한 멍에돌 등 극히 일부분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석교가 온전하게 지하에 매몰되어 있음을 확인한 것이어서 방송은 특종이 되었고, 남석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촬영한 영상은 이후 자료화면으로 여러 차례 방송에 다시 나오곤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석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나는 마치 참고인 조사받듯이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개인적인 관심도 높아져서 남석교의 문화재적 가치와 청주에서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글을 쓰기도 하는 등 남석교와의 숙명적이 만남이 이루어졌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