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10-2. 다시 찾아야 할 보물 무심천 남석교 무심천과 남석교의 모습
그로부터 얼마 후 일제잔재로 남아있던 ‘본정통’을 ‘성안길’로 바꾸고, 청주읍성의 4대문 터에 표석을 세우는 등의 가시적인 성과에 힘입어 점차 청주읍성과 남석교에 대한 인식이 전문 학자를 넘어 일반시민에게까지 넓혀지자 당시 청주시장도 관심을 갖고 기초조사부터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2000년도에 청주시로부터 지원을 받아 처음으로 청주읍성과 남석교에 대한 학술조사를 하였다. 청주읍성이나 남석교 모두 이미 없어지거나 땅속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문헌과 잔존하는 관련 유적유물들을 최대한 조사하여 보고서를 펴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004년도에는 드디어 남석교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용역명은 남석교 발굴조사 및 복원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학술연구였다.
문화재청의 발굴허가는 2003년 10월 30일부로 어렵지 않게 받아냈으나 이후의 진행과정은 매우 험난하였다. 육거리시장 상인들과의 협의가 난제였기 때문이다. 11월 17일에 1차로 상가번영회 사무실을 찾아가 번영회 임원들과 협의한 결과 대화가 잘 이루어져 번영회 측에서 일단 반대하는 주민을 설득해 보기로 하였다. 협의는 시청 공무원들이 주로 하였고, 나의 역할은 남석교의 가치와 발굴조사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2004년 2월까지 3차에 걸쳐 협의한 결과 번영회 임원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편이었지만, 직접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들은 발굴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3월 13일에 열린 주민회의에서는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반대의견이 회의장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대화를 계속하여 5월 22일에 번영회장 및 상가주 대표자회의에서 발굴조사를 해보자는 쪽으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합의 조건은 발굴조사 후 남석교가 매몰된 부분에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것으로 상인들의 설득하고, 남석교 복원 여부와 방법은 발굴조사와 별도로 주민과 다시 협의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상가번영회의 호의적인 반응으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지켜본 후 9월 1일에 청주시와 청주대학교 박물관이 학술연구 용역계약을 체결하였고, 10월 8일 육거리시장 주민들에게 통보하였다. 그러자 10월 11일 시장연합회 회장단은 회의를 열어 찬반여론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다음 날인 10월 12일 인근상인의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총 36명 중 찬성 27명, 반대 9명으로 발굴조사에 찬성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반대하는 주민들만 따로 모여서 22명이 서명한 진정서를 제출함에 따라 10월 14일에 육거리종합시장연합회 사무실에서 주민 간담회를 다시 개최하였다. 발굴에 반대하는 주민들에게 육거리시장의 활성화와 정체성 확보를 해서는 학술조사가 필요하고 영업에도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 역설하면서 이해와 협조를 구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발굴조사 후 원상복구와 아케이드 설치를 조건으로 발굴조사 계획을 받아들이겠으나, 남석교의 문화재 지정과 복원은 절대 반대한다는 의견을 수렴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은 현장에 대한 발굴조사는 시장이 철시한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만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고고학 역사에 유래가 없는 야간 발굴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작업을 마쳐야 했으니 실제 작업은 3시에 마치고 발굴한 구덩이를 철판으로 덮어 사람과 차량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남석교의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발굴조사는 대학수능시험이 끝난 이후 하는 것으로 최종 합의하여 11월 22일부터 12월 3일까지 12일 동안 진행하였다. 발굴 후에는 아스콘 포장을 하여 도로를 원상 복구하였고, 12월 27일 자문위원회의를 거쳐 12월 29일 상가번영회 사무실에서 주민 간담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도 주민 만장일치로 복원 및 문화재 지정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청주시에 전달하였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발굴조사와 함께 문헌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지금 생각해도 주민의식과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고, 남석교의 전모를 확인하지 못한 발굴의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발굴 중에는 한 주민이 곡괭이를 들고 나와 위협하며 발굴을 방해하는 공포를 겪기도 했고, 호기심 많은 주민은 새벽까지 현장을 지켜보며 참견하는 통에 이래저래 힘들었는데, 세월과 함께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1910년대의 남석교 답교 모습
남석교에 대해서는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단편적인 기록이 조금씩 보이고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석교를 ‘대교(大橋)’라 소개하고 곧 ‘정진원 앞에 있는 다리(情盡院前橋)’라 하였다. 요즘엔 대교라 이름 붙인 교량이 전국에 수없이 많지만 예전에는 남석교 정도는 되어야 대교라 하였고, 대교가 있는 내라 하여 대교천이 되었으니 지금의 무심천이다. 그리고 지금의 제일교회 자리에 정진원이 있었는데 남석교가 그 남쪽에 인접해 있어 정진원 앞 다리라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여지도서』에서는 대교는 일명 ‘남석교’로서 곧 옛 정진원 앞의 다리라고 기록하여 처음으로 남석교의 명칭이 보인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