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10-3. 다시 찾아야 할 보물 무심천 남석교 남석교는 홍수나 하천 범람으로 붕괴되기 쉬운 교량의 특성상 여러 차례 수축이나 개축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1547년(명종 2) 6월 24일에 충청감사 김익수(金益壽)는 청주 남문 밖의 내가 넘쳐 읍내의 인가가 거의 다 물에 잠겨 석교(石橋) 30여 칸이 무너지고, 민가 16가구가 휩쓸려 떠내려갔다고 왕에게 보고한 기록이 실록에 보인다. 조선 후기에도 두 차례의 개축 기록이 있다. 19세기에 필사된 『낭성지』에 계묘년의 대홍수로 남석교의 3칸이 떠내려가자 최상정(崔尙鼎) 목사가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상정은 봉조하 최규서의 아들로 경종과 영조 때 벼슬을 하였던 사람이다. 따라서 계묘년은 1723년(경종 3)으로 추정된다. 『충청도읍지』에는 목사 안정탁(安廷鐸)이 을묘년에 구휼을 베풀고 남석교를 개건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안정탁은 1794년(정조 18)에 청주목사로 재임한 것으로 왕조실록에 보이므로 을묘년은 1795년(정조 19)에 해당된다. 여기서 을묘년에 구휼을 한 것과 같은 해에 남석교를 다시 세운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당시의 지방관 재임기간이 매우 짧았던 것을 감안하면 남석교의 개축연대를 1795년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즉 18세기에만 1723년과 1795년에 개축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사이에도 개축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기록만을 통해 본다면 1723년에 교량의 3칸이 유실되어 일부를 개축하였고, 그로부터 72년 후인 1795년에 전체적으로 개건한 것이다. 아마도 18세기말에 개건된 돌다리가 일제강점기까지 그대로 유지되었고, 지금 땅 속에 매몰되어 있는 남석교도 그 때의 모습일 것으로 생각된다.
청주고지도에 그려진 청주읍성과 남석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석교의 축조와 관련하여 애틋한 모정이 서린 전설이 내려온다. 신라시대 서원경 남쪽에 있는 남천(南川) 즉 지금의 무심천에 외나무다리를 놓고 고을 사람들이 문안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어느 날 어린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고 있던 과부댁이 시주를 하러 온 대원사(大元寺) 수행승에게 아이를 잠시 맡기고 문안으로 볼일을 보러갔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맡은 수행승이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마루에 앉아 잠깐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어린아이가 밖으로 나와 남천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이 광경을 본 아이 어머니는 크게 슬퍼하며 시체를 건져 화장하고는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대원사 주지스님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수행승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큰 불행을 당한 것을 심히 송구스럽게 생각하여, 그 외나무다리를 철거한 후 그 자리에 튼튼한 다리를 놓기로 하였다. 가까운 고을에 있는 중들을 총동원하여 동쪽 선도산(仙到山) 기슭에 막장을 치고 돌을 다듬어 남천으로 운반하는 다리 역사가 크게 벌어졌다. 밤낮으로 돌 깨는 소리와 어린이 영혼을 달래는 진혼경(鎭魂經) 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동쪽 막장에서 돌을 등에 지고 남천으로 이어지는 스님들의 행렬은 근 석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돌로만 조립된 웅장하고 견고한 돌다리가 남천에 놓이게 된 것이니 곧 남석교라는 것이다. 이야기의 요점은 신라시대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이를 절에서 스님들이 돌다리로 개축하였으며, 그 석재를 선도산에서 채취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의 요소만 빼면 모두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낭성지』에는 청주의 읍기가 본래 용두사(龍頭寺)의 터인데 절을 폐하고 읍성을 축조하였으나 앞이 개설되지 못하자 용두사 스님들이 다리를 놓았다는 것이다. 대원사와 용두사의 절 이름은 달라도 스님들에 의해 남석교가 가설되었다는 내용은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밖에 조충현의 저서인『하주당시고(荷珠堂詩稿)』에는 남석교비(南石橋碑)에서 이르기를 한선제(漢宣帝) 오봉원년(五鳳元年)에 가설되었다고 소개되어 있다. 현재 남석교비는 행방을 알 수 없고 오봉원년에 가설하였다는 내용 역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청남교(淸南橋)’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청주군의 남문 밖에 있는데 일명 남석교라 하고, 한 선제 오봉 원년에 가설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밖에 일본인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峰)가 쓴 『청주연혁지』 명승고적 편에는 ‘시의 남단에 연하여 흐르는 무심천에 놓였는데 남석교라 부른다. 신라시대 한 선제 오봉원년 즉 지금으로부터 1975년 전의 옛날에 가설한 것이다. 그 길이는 34~35간이다. 근래까지는 2층의 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수류의 변천으로 토사에 매몰되어 지금은 겨우 그 일단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다리의 양단에는 높이 약 1간의 고려견(高麗犬) 4개가 세워져 있었지만, 2개는 지사 관사에, 2개는 동공원으로 옮겼다. 교판과 교각은 얼마나 거대한 석재로 되어 있는지 일견하여 가설 당시의 읍의 영화를 상기하는데 충분하다’고 하였다.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