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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함 속에 인간의 정신을 그리다

2017-12-29

문화 문화놀이터








    초상화는 골상이나 관상 등 외형을 똑같이 그리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인품이나 성격 등의 내면적인 특징까지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심지어는 초상화만으로 피부병변을 의학적으로 진단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으로 그렸다.


유교를 근본으로 한 조선, 초상화의 전성시대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걸작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에서부터 공신상(功臣像), 사대부상, 기로도상(耆老圖像: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이 형식적인 최고 관부라 할 기로소에 입사한 것을 기념한 도상), 여인상, 고승(高僧)의 진영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어진일 경우 군복을 입은 군복본, 면류관에 구장복을 입은 면복본, 복건에 학창의를 입은 복건본, 갓에 도포를 입은 입제본 등 다양한 형식이 그려졌다. 공신상과 사대부상은 관복조복본과 유복본 등이 좌상이나 입상의 형식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초상화가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조선왕조가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삼아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사당과 영당, 서원에 모실 초상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초상화는 단순히 추모하는 대상의 이미지라는 차원을 넘어 조상이나 스승 그 자체였다. 제사의 참석자들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때 조금이라도 닮지 않으면 제사 지내는 대상이 딴사람이므로 온편(穩便)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실제 인물과 똑같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원칙은 중국의 정이(程?,1033~1107)가 초상화를 논하면서 “터럭 하나라도 흡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毛一髮不相似 便非其人)”라고 했던 가르침을 초상화가들이 그대로 적용하면서 실물과 아주 비슷한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초상화가 중요했던 만큼 초상화를 잘 그리는 화가의 명성은 높았고 특히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어진화사는 모든 화가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영광의 자리였다.





인물의 병변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낸 초상

    대상을 거짓 없이 그려야 한다는 원칙은 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1335~1408)의 어진은 개국시조답게 왕실의 정통성을 보여줄 수 있도록 서울의 문소전을 비롯하여 경주, 개성, 평양, 전주, 영흥 등 여섯 곳에 진전을 두고 어진을 봉안하였다. 현재는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1872년의 이모본(移模本) <태조어진>(그림1)만이 전해질 뿐이다. 용상에 앉아 있는 얼굴은 근엄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이 군주로서의 위엄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렇게 근엄한 왕의 어진을 그리면서 그의 이마에 난 반점까지도 빼놓지 않고 그려 넣었다. 즉 오른쪽 눈썹 위 이마에 지름 0.7~0.8cm의 비정상적인 피부병변인 작은 혹을 표현했다.(이하 피부질환에 대한 내용은 이성낙,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변에 대한 연구> 참조). 왕의 초상화를 그리면서도 예외 없이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다는 원칙을 적용한 사례이다.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야할 어진이 이 정도로 사실적인데 사대부나 공신의 초상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사실은 <오명항초상>(그림2)과 <신임초상>(그림3)의 세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여 분무공신에 봉해진 오명항(吳命恒, 1673~1729)의 초상화를 보면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두창(痘瘡)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얼굴색이 정상인보다 훨씬 더 어두운데 이것은 간암 말기 증상인 흑달 (黑疸)로 추정된다. 공조판서였던 신임(申?, 1639~1725) 초상에는 얼굴 곳곳에 검버섯이 눈에 띄고 눈자위가 붉게 충혈되어 있다. 허리띠에는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들만 할 수 있는 붉은색 허리띠를 둘렀는데 이렇게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을 그리면서 굳이 얼굴의 약점일 수 있는 검버섯까지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현재 우리가 사진을 찍으면 얼굴의 잡티나 흉터를 포토샵으로 깨끗이 보정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 실명(失明)과 사시(斜視), 크고 작은 흉터와 노인성 흑자(黑子), 천연두자국은 물론 다모증(多毛症)과 무모증(無毛症), 흑색황달(黑色黃疸)이나 피부홍반 루푸스 등 희귀난치 피부병에 속하는 질환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공신상이나 기로도상은 주로 고위관직에 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린 초상화이다. 그들의 초상화에서 이런 ‘외모 장애’라고 할 수 있는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외모에 대해 편견을 두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높은 지위에 오른 남성들의 전유물

     조선시대 초상화는 전신사조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시대적으로 그 변화과정을 읽을 수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태조어진>이나 <윤두서의 자화상>처럼 정면관을 그린 초상화도 있으나 대부분의 공신도상은 좌안(左顔)이나 우안(右顔)으로 그려졌다. 조선초기의 <신숙주초상>(그림5)은 녹포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으로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슴은 거의 팔각형처럼 넓고 얼굴은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으로 사모가 높고 양쪽 뿔이 좁고 길다. 단령은 목에 바짝 붙을 정도로 올라가 있고 붉은색안감이 드러난 옆트임은 각지게 표현되어 있다. 족좌대에 올린 발은 11자처럼 가지런하며 의자에는 방석을 묶은 끈이 보인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오명항초상>(그림6)은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공수자세를 취한 전신교의좌상이라는 점에서 <신숙주초상>과 공통된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사모는 매우 높고 양쪽 뿔이 넓고 짧으며 단령은 아래로 내려온 점에서 조선 후기의 특징이 드러난다.
    조선시대에는 뛰어난 초상화가 많이 제작되었지만 여인의 초상화는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강세황이 그린 <복천오부인86세초상>과 채용신이 그린 여인초상화 등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특별한 사례에 불과하다. 왕후나 공주, 사대부가의 여인상들은 아예 그려지지 않았다. 남녀유별이 각별했던 시대에 단지 초상화를 그린다는 명목으로 지체 높은 여인의 얼굴을 감히 외간남자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여인의 초상화는 그나마 몇 점이라도 남아 있는데 반해 어린아이의 초상화는 전무하다. 조선시대에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이는 불효자라고 했다. 그런 불효자의 초상화를 사당에 올려놓고 향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높은 지위에 오른 남자들만으로 국한된다. 화폭에는 1인만 그린 것이 원칙이었고 배경은 거의 생략되며 분위기는 엄숙하고 경건하다. 비록 조선시대 초상화가 형식과 대상이 매우 국한되어 있지만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정신까지도 그려낼 수 있었던 점은 괄목할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