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돌을 두드려 글자를 새긴다는 건 단지 기록을 남긴다는 뜻만은 아니다.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 간절한 마음,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 금석문은 그렇게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기억이자,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약속이다.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금석문(金石文)은 ‘쇠로 만든 종이나 돌로 만든 비석 따위에 새겨진 글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뭇사람들에게 금석문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체로 돌에 새긴 글자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강원도 철원의 도피안사(到彼岸寺)에는 국보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의 등 부분에 ‘함통(咸通) 6년(865)’이라는 불상의 제작 시점은 물론이고 불상을 조성한 배경 등을 새긴 명문이 있다. 이처럼 철을 비롯한 금속 성질을 띤 재료에 새긴 글자도 있는데, 이를 금문(金文)이라고 한다. 금문(金文)과 돌에 새긴 글자인 석문(石文)을 합쳐 금석문이라고 부른다.
돌은 쉽게 깨어지지 않는 ‘단단한’ 성질이 있다. 철도 마찬가지이다. 혹자는 철이 녹슬고 부식되므로 돌과 성질이 다르지 않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옛사람들에게 철은 단단함 그 자체였던 듯하다. 철옹성(鐵甕城)이나 철벽수비(鐵壁守備)라는 단어에서 ‘철(鐵)’의 의미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철이나 돌같이 단단한 재료에 손수 글자를 새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옛사람들이 글자를 새기기 위해 굳이 단단한 재료를 선택한 것은 여기에 새긴 내용이 잊히지 않고 길이길이 전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가뭄 속 단비, 고대 금석문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사료의 부족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더욱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마저 고려시대에 편찬되다 보니 사료의 신빙성과 윤색의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금석문, 특히 고대 금석문은 가뭄 속 단비와도 같다. 고대 금석문은 무엇보다 당대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리고 금석문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하지 않는 새로운 내용이 담긴 경우가 많고, 새로운 금석문의 발견으로 학계의 논란이 마침표를 찍기도 한다.
1971년 7월 공주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5호분과 6호분의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고분 1기가 발견되었다. 고분의 입구를 막아놓은 막음벽돌을 제거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지석(誌石) 2점이 놓여 있었다. 이 지석의 첫머리에는 각각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百濟) 사마왕(斯麻王)이 나이 62세인 계묘년(癸卯年, 523) 5월 병술삭(丙戌朔) 7일 임진(壬辰)에 돌아가셨다”, “병오년(丙午年) 11월 백제국(百濟國) 왕태비(王太妃)가 수명을 다하셨다”라는 내용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를 통해 이 고분에 묻힌 주인공이 무령왕(武寧王)과 그 왕비임이 확인됐다. 수많은 백제 고분 가운데 주인공이 명확하게 밝혀진 경우는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523년 5월에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국보 「무령왕릉 지석」1)의 발견으로 『삼국사기』 기사의 신빙성에 무게가 실리게 되었다. 이렇듯 「무령왕릉 지석」 발견의 쾌거는 엄청났다.
1988년에는 국보 「울진 봉평리 신라비」2)가 발견됐다. 524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탁부(喙部)의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 즉 법흥왕이 사탁부(沙喙部)의 사부지(徙夫智) 갈문왕(葛文王)을 비롯한 다른 부(部)의 대표자와 함께 울진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을 처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524년까지만 하더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분쟁조차 국왕이 단독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6부 대표자의 공론(公論)을 통해 결정해야 했던 실상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지방에서 발생한 문제를 6부의 대표자가 모여 공론을 거쳐 처리하는 모습은 1989년에 발견된 국보 「포항 냉수리 신라비」3)에서도 재차 확인되었다.
황금으로 만든 다양한 장신구를 지닌 채 경주 시가지의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에 묻힌 마립간은 초월적 지배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지만, 정작 520년대까지 신라 국왕은 6부의 대표자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한편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언급된 ‘교법(敎法)’, ‘노인법(奴人法)’ 등의 용어도 주목을 받았는데, 520년에 반포된 율령이 실제로 시행됐음을 알려준다. 이에 따라 520년 법흥왕의 율령 반포를 부정하는 일본학계의 견해는 설 자리를 잃게 됐다.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쳐 우리 곁으로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는 1796년 무렵 경주 주민이 밭을 갈다가 문무왕비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금석문 연구에 일가견이 있던 김정희는 선덕여왕릉 아래 낭산 남쪽 기슭에서 돌무더기와 수풀 더미를 뒤지며 「문무왕릉비」의 상단부4)와 하단부5)를 재확인했다. 그 뒤 「문무왕릉비」는 행방이 묘연했는데, 1961년에 하단부, 2009년에 상단부가 경주 동부동에서 각각 발견되었다. 사천왕사 터 인근에 있던 「문무왕릉비」가 어떤 연유로 직선거리로 4.2㎞나 떨어진 동부동으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1796년 무렵의 최초 발견자와 홍양호, 김정희, 나아가 현대의 마지막 제보자가 아니었더라면 「문무왕릉비」가 과연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금석문은 탄생 과정부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글을 짓는 사람, 글자를 쓰는 사람, 글자를 새기는 사람 등. 그리고 잃어버렸던 금석문은 여기에 발견자, 그리고 금석문을 판독하고 해석하고자 안간힘을 쓴 연구자가 추가된다.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한 금석문일지라도 여러 사람의 손길이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렀음은 분명하다. 보이지 않는 이들이 금석문 때문에 흘린 땀방울을 누군가는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아울러 어떤 이의 손길 덕분에 새로운 금석문이 발견됐다는 소식도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