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삶의 풍경이 머무는 곳
[수필] 햇살의 줄탁
'글. 유병숙'

북악산 위로 아침 해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마당 데크 위 부겐베리아에 햇살이 내려앉는다. 햇살의 줄탁! 가녀린 가지에서 갓 태어난 이파리가 꼬물거린다. 주홍빛 꽃다발이 휘청인다.
본시 이 부겐베리아는 아파트 남향 베란다에 놓여 있었다. 산책길에 노점상에서 남편이 사들인 것이다. 그때는 꽃 색깔이 분홍이었다. 꽃 덩이가 집 안을 환하게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잎과 꽃이 하늘하늘 지기 시작했다. 마른 꽃잎이 화분 주위에 낭자했다.
웬일인가 싶어 화초 영양제에 쌀뜨물까지 주며 정성을 들였다. 언젠가 물을 주다 화분을 살짝 건드린 적이 있었다. 그 서슬에 그만 남아있던 이파리들마저 우수수 떨어졌다. 남편이 실망할까 봐 돌아보았다. 눈을 끔뻑이는 양이 그냥 놔두라는 눈치였다.
나는 마음이 편치 않은 걸 감추려고 일부러 없애버리자, 다른 걸 심어야겠다, 죽었는데 물은 주어 뭘 하냐며 투덜대었다. 내 지청구를 알아듣기라도 한 양 마른 가지에 이파리 하나가 쏙 돋아났다. ‘나, 아직 살아있어요’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그렇게 하나둘 돋아난 이파리가 제법 늘어 날 무렵, 가지 끝에 연분홍 꽃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주 눈길을 주던 남편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기려나 하는 기대를 내비쳤다.





눈에 잘 띄는 곳으로 화분을 옮기고 돌보았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꽃잎들이 종잇장처럼 떨어져 내렸고 다시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얼른 떨어진 꽃잎을 쓸어 모으며 이젠 내다 두어도 누가 가져가지도 않을 거야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쏘옥 이파리를 내보내는 부겐베리아! 녀석과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남편의 병세도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그이가 급격히 쇠약한 기색을 드러냈을 때 문득 본가가 떠올랐다. 셋집으로 전전하던 시절, 시아버님은 당신의 문패가 달린 집에서 죽기를 소원하셨다. 당시 노총각이었던 남편은 빚을 끌어모아 인왕산 마루에 집을 마련했다. 아버님은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하였고 그 집에서 무려 32년을 더 사셨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은 두 분을 여읜 후 빈집이 되었다. 산꼭대기의 집은 50여 개의 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대문이 나타난다. 그이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차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볕 바른 마당이 자꾸 손짓을 해댔다. 우리도 올라가 딱 32년만 살아봅시다! 남편을 부추겼다.
본가의 햇빛은 예상보다 일조량이 넘쳐났다. 햇빛에 노출된 물건들은 바래지고 삭아졌다. 잔디밭에 앉아 우후죽순처럼 자라난 잡초를 뽑았다. 등에 따가운 빛이 내려앉았다. 웬일인지 피하고 싶지 않았다.
햇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전자기파다. 빛의 속도는 초당 30만km이고 태양은 지구로부터 1억 4,900만km 떨어져 있다. 따라서 태양광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8.4분이다. 그러니까 8분 전에 태양을 떠난 빛이 마당에 수많은 화살처럼 내리 꽂히고 있는 것이다. 찬란한 빛에 눈이 멀 것 같았다. 문득 빛바랜 사연들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추웠던 시절, 나는 이 마당을 얼마나 맴돌았던가. 엄마를 떠나 철모르고 시작한 시집살이였다.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무서운 세월이었다. 젖은 빨래를 마당에 내 걸며 나는 해바라기가 되곤 했다. 따가운 햇살이 나를 하얗게 산화시켰다.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처럼 고단한 마음도 서서히 마르곤 했다. 그때의 숨결이 아직도 마당 구석 어딘가에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광활한 우주로부터 달려온 빛이 내게 무차별적인 세례를 퍼부어댔다. 응어리져있던 오랜 우울이 서서히 풀려나갔다. 햇빛이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날것의 빛을 두 팔 벌려 기꺼이 맞이한다. 괜찮다, 그리고 다 괜찮았다…. 어느새 나를 위무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사할 때 가져온 화초들도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한 달여 노천을 견뎌낸 커피나무, 레몬나무에 새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화분의 동백나무를 땅에 옮겨 심었다. 동사한 줄 알았던 봉오리가 마침내 활짝 꽃잎을 열었다.
부겐베리아는 나목 흉내를 걷어냈다. 두껍고 싱싱한 이파리가 촘촘하게 솟아났다. 가지 끝에는 가녀린 분홍빛 대신 주홍빛 꽃들이 피어났다. 열정, 사랑이라는 꽃말에 화답하듯 나날이 고혹적인 모습을 갖추어갔다.
주지하다시피 식물은 흙, 물, 빛이 있으면 산다고 했다. 그간 나는 아파트에서 화분에 물을 준다, 계란껍질을 올려놓는다, 거름흙을 북돋아 준다, 영양제를 꼽아준다, 볕이 긴 곳으로 옮겨 주는 등 부산을 떨어왔다. 시들거나 병이 들면 속을 끓이며 사람을 대하듯 온갖 변덕을 부리곤 했다.

잘 자라지 않는다/ 쉽게 시든다/ 거름 부족이거나 햇빛 부족이 아니라/ 물 과잉이 원인이다/ 오늘날 우리 삶이 그렇다

-나태주 시 「화분식물」 전문

그렇다! 지나고 보니 과잉이 원인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쏟아부은 과도한 애정이 녀석들을 숨 막히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연은 나의 과오에서 벗어난 녀석들을 조용히 쓰다듬고 찬찬히 돌보았다. 햇빛의 밀어를 순순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녀석들은 이제 더는 온실의 화초가 아니었다. 그들만의 은밀한 잔치에 나는 한 일도 없이 선물을 받게 되었다.
햇살은 남편을 수시로 일으켰다. 그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앞산을 바라보고 했다. 보고 또 봐도 물리지 않는단다. 충만한 햇볕이 그이 곁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나도 곁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나는 두고 온 마당을 그리워했다. 쇠락한 집은 웬일인지 나날이 햇빛 부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그 찰진 빛이 그리워 시도 때도 없이 아파트를 서성이기도 했다. 돌고 돌아 비로소 마음의 고향에 정착한 나는 이제 어두웠던 생각을 햇빛에 널어 말리고 있다. 어쩌면 이 광경을 다시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에 바랄 것도 보탤 것도 없다.
남편은 툭하면 부겐베리아를 들여다보았다. 아파트에선 피어나기 무섭게 져버리고 말았던 종이꽃이었다. 마당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세찬 비가 내렸다. 때 이른 천둥이 멀리서 우르르 울고 가기도 했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들이며 하루하루 더 탐스럽게 자태를 뽐내고 있는 꽃을 보며 그이의 뺨에 모처럼 화색이 돌았다.
부겐베리아의 진분홍 포엽들이 한껏 유혹의 수위를 높이는 사이, 중앙에 돋아난 하얀색 진짜 꽃들이 벙글어졌다. 그야말로 꽃 속의 꽃이다. 화사한 외양에 못지않게 알찬 내면을 두루 다 갖춘 셈이다. 진 꽃의 개화 소식을 들었는지 나풀나풀 흰 나비가 다녀가고 까닥까닥 노란 딱새도 놀러 왔다. 나는 그들의 연애 노름을 몰래 지켜보고 있다. 부겐베리아는 때때로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나는 오늘도 경청해 마지않는다.

EDITOR 편집팀
유병숙 작가
이메일 : freshybs@hanmail.net
『책과 인생』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명예회장
한국문인협회,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산문문학상,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2회 수상
제12회 한국문학백년상 수상
『충청매일』에 에세이 연재
『조선일보』에 에세이 게재
수필집 『그분이라면 생각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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